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33)
(30)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31) 100년 만에 완결된 수취 제도, 대동법
(32) 18세기, 조선의 미(美) 달항아리
(34) 왕의 아버지가 정치를 대신하다
(35) 최초로 근대 국가를 시도하다
(30)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31) 100년 만에 완결된 수취 제도, 대동법
(32) 18세기, 조선의 미(美) 달항아리
(34) 왕의 아버지가 정치를 대신하다
(35) 최초로 근대 국가를 시도하다
![[한국사 공부]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https://img.hankyung.com/photo/201510/01.10677672.1.jpg)
조선 왕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삶을 산 정조
당시 이 행렬에 참가한 인원만 1779명, 말도 779필이나 됩니다. 그 규모가 엄청나 한강을 건널 때는 배가 아니라 아예 수많은 배를 엮어 만든 배다리를 사용합니다. 아, 참고로 그 배다리를 제작하는 데 실학자이자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이 적극 참여하였지요. 자, 이렇게 대규모 행렬이 먼저 간 곳은 영조의 노여움으로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입니다. 그리고 왕권 강화의 필수적 요소인 친위부대의 군사훈련을 참관한 것이지요. 사실 어머니 환갑잔치보다 이 두 가지가 먼저 있었다는 점에서, 결국 사도 세자의 죽음을 지지했던 세력 또는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신하들은 매우 불편한 자리이거나 왕의 숨은 뜻을 헤아려 보기 위해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정조, 그는 1776년 왕위에 올라 24년 여 동안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책을 실시하며 조선 후기 정치 사회적 발전을 이끈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른 순간부터 1800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매 순간이 드라마틱했습니다. 아버지 사도 세자가 모반을 꾀했든, 정신병을 앓고 있었든 그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해도 결국 사도 세자를 반대하고 그의 죽음을 지지했던 명백한 정치 세력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정조는 차마 자신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이 세력을 확실히 누르며 개혁 정치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정조는 조선 전기 최고의 군주 세종을 자신의 롤모델로 정합니다. 백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 그리고 이를 위해 그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고 정치부터 경제, 사회, 예술, 과학까지 다방면의 성과를 남기게 됩니다.
강력한 탕평책과 규장각 활성화한 정조

이 중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은 앞서 언급한 장용영입니다. 1793년에 정조는 국왕 호위 전담부대를 신설합니다.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으로 구성하여 친위부대를 별도로 만든 것입니다. 이미 규장각 검서관 출신의 박제가와 당대 최고의 무사라는 백동수가 힘을 모아 만든 무술교본인 『무예도보통지』가 나왔으며, 이를 장용영이 익히며 군사훈련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계사에서 유럽의 루이 14세 등 절대왕정 시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은 상비군이었습니다. 정조의 장용영도 왕권 강화를 통해 자신의 반대 세력까지 확실하게 누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세상 떠난 뒤 정조 정책이 대부분 사라져
![[한국사 공부]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https://img.hankyung.com/photo/201510/01.10554653.1.jpg)
정조 사후 1년 뒤, 곧 신유박해라 하여 남인 세력이 숙청당하고 2년 뒤에는 장용영이 해체됩니다. 규장각의 기능도 순수 왕실 도서관으로 축소되지요. 그리고 조선의 19세기는 이른바 세도 정치라는, 특정 가문에 의해 정치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으로 빨려들어갑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