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32)
(30)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31) 100년 만에 완결된 수취 제도, 대동법
(33)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34) 왕의 아버지가 정치를 대신하다
(35) 최초로 근대 국가를 시도하다
지난 호에서 저는 100년이나 걸려 완성된 개혁 민생 법안 대동법을 언급하였는데요. 이번 호에서는 대동법이 완성된 직후부터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춰 그 후 100년 동안이나 유행을 지속한 최고의 예술품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숙종 말년부터 영조 시기에 최절정의 예술적 완성도를 뽐낸 문화재이자 하루종일 봐도 또 보고 싶을 만큼 너무나 아름답다는 백자, 바로 18세기의 ‘달항아리’가 그것입니다.(30)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31) 100년 만에 완결된 수취 제도, 대동법
(33)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34) 왕의 아버지가 정치를 대신하다
(35) 최초로 근대 국가를 시도하다
하루종일 봐도 또 보고 싶은 ‘달항아리’
사실 백자는 이미 고려 시기부터 제작되었고, 중국의 징더전에서 제작된 매우 다양하고 화려한 백자가 엄연히 존재하였지요. 더구나 조선에서도 이미 세조의 통치 후반이었던 15세기 후반에 경기 광주 일대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소, 즉 ‘관요’을 설치하고 지속적으로 제작한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시대하면 곧 백자를 떠올릴 만큼 상징적 존재이기도 했지요. 왜냐하면 백자는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를 오롯이 담은 최고의 미적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고결하고 검소하면서도 청렴한 성인 군자의 정신 세계를 그대로 드러난 도자기가 바로 백자였습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무나 이 백자를 소유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최고의 성인 군자를 상징하는 왕이 사용하는 그릇이기 때문이지요. 실제 15세기 후반 『경국대전』에는 백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청화백자를 왕실이 아닌 신분이 사용하면 장 80에 처하도록 규정하였어요. 그만큼 왕실이 백자를 독점하였던 것이고요.
반대로 양반 사대부 입장에서는 성리학적 고결함을 담은 이 백자를 『경국대전』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어했지요. 그래서 관요에 남몰래 압력을 가해 백자를 갖게 되거나 심지어 일부는 밀무역으로 들어온 중국산 백자를 사용하기까지 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백자에 대한 수요가 잠시 수그러들기도 했지만 앞서 언급한 대동법 등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다시 백자는 전국적인 유행은 물론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중인층과 평민층에서도 신분 상승의 욕구가 백자 소유욕으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세기 ‘달항아리’와 같은 최고의 예술품을 탄생시키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지요. 백자가 신분과 부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18세기 부와 신분 상승의 상징
달항아리는 둥그런 단지 형태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주판알이나 좀 볼록한 바둑알과 같은 타원형 형태였는데 점차 18세기로 갈수록 밑바닥 받침(굽)과 위의 아가리(구연부)가 비슷하며 최대 지름과 높이가 엇비슷한 달항아리가 된 것이지요. 달덩이 같은 모양에 우유 빛깔과 같은 흰색이 합쳐진 것인데요. 학자들은 아마도 음식 저장용으로 쓰이거나 제사용 또는 감상용으로 쓰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결국 실생활에서 점차 독자적인 예술품의 경지로 올라간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제작하였을까요. 우선 주재료인 백토, 즉 흰 흙을 얻기 위해 바윗덩어리부터 캐야 합니다. 관요가 있었던 경기 광주와 강원 양구 등에서 질 좋은 백토를 채취했다고 합니다. 흰 흙을 얻었다고 해도 시작일 뿐입니다. 백토 속의 성분에 철이 많으면 가마에서 구워지는 동안 검은색 계열(주로 회색빛)로 짙어질 수 있어 철분을 최대한 낮추는 과정이 필수입니다.
즉 흰 흙을 물과 섞은 후 아래로 가라앉은 것 말고 위로 뜬 물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체로 받쳐내면 철분을 함양하지 않은, 이른바 우유 빛깔을 낼 수 있는 백토를 얻게 됩니다. 물론 유약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18세기에는 마그네슘이 첨가된 유약을 발라 그 은은한 느낌을 더욱 살렸다고 합니다. 이제 요즘 도자기를 만드는 것처럼 의자에 앉아 발로 물레를 회전시키며 모양을 만듭니다. 단, 이 달항아리를 단 한번에 만들지는 못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박물관에서 자세히 보면 달항아리 가운데 금이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국보가 겨우 금이 간 백자냐고요?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금이 아니라 두 개의 항아리를 이어붙인 결과입니다. 크기가 너무 큰 탓에 한 번에 물레로 만들지 못하고 위, 아래를 각각 만든 후 접합하여 완성한 것입니다. 국보 제309호 백자 달항아리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도공의 솜씨는 최고라 그 이어붙인 부분이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일그러지지 않고 거의 완전한 원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그만큼 전반적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뽐내고 있습니다.
두 개의 항아리를 이어붙인 대작, 달항아리
이렇게 18세기에 달항아리가 절정의 모습으로 유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왕실부터 평민까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달항아리에 환호했을까요? 우선 저는 무엇보다 당시 탕평책을 실시하였던 영조의 예술적 안목을 손꼽고 싶습니다. 영조는 이미 왕세제 시절 도자기를 관리하던 사옹원(원래는 궁궐 음식 담당 관청)의 최고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를 역임했습니다. 그때 이미 백자에 대한 감식안을 갖춘 것이지요. 따라서 경기 광주의 관요에서 수준 높은 백자를 만들 수 있었으며 곧 왕의 안목이 유행처럼 번졌던 것은 아닐까요?
한편 당시 왕실과 양반사대부들이 공유하였던 성리학의 핵심 이론을 형상화한 태극(太極)을 형상화한 것이 달항아리이기 때문에 급속도로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음양의 조화를 보여주는 태극의 상징이자 입체적인 조형물로서 달항아리만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당시 붕당 정치가 극에 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실시한 탕평책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반면, 백자가 하나의 상품으로 유행을 심하게 타는 와중에 마음을 비운 도공이 순수하게 탄생시킨 예술품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찌 됐건, 아직 우리는 18세기 조선의 미를 대표하는 백자 달항아리를 충분히, 그리고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시 공부로 지친 심신을 이 달항아리로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조선 후기를 상징하는 또 다른 예술대작, 달항아리였습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