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경제의 만남 (82)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한 달에 서너번 이상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은행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금융거래가 온라인을 통해 수행되면서 어떤 달에는 한 번도 은행을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 일상의 변화는 불과 10여년 만에 은행과 은행업무가 얼마나 급변했는지를 반증해 준다.
은행의 업무 방식과 형태가 이처럼 급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이 하는 궁극적인 기능과 역할들은 여전하다. 은행이 가지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기능이자 필요성이 자금의 보관과 결제 기능이다. 이는 은행의 형성과정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초창기 은행은 12세기 베니스와 제노아에서 설립되었다.당시 은행들은 선박을 타고 먼 거리를 돌아다니며 상거래를 해왔던 상인들을 위해 그들의 자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하였다.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객주(客主),여각(旅閣)에서 상인들이 가져온 물건을 비롯한 자금의 보관 업무 및 결제 업무 등을 담당한 바 있다. 그리고 곧이어 은행 역할을 해온 이들을 통해서 예금의 일정액이 구두 지시,가끔은 서면 지시를 통해서 상거래에 따라 다른 계좌로 이체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상거래를 통해 얻은 주화나 자금을 다시 가지고 다니는 데 많은 위험과 비용을 수반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러한 번거로움 없이 은행에 자금을 맡겨두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 믿고 거래하는 신용거래를 선호하게 된다.
당시 상인들이 이러한 신용거래를 선호하게 된 또 다른 이유로는 초창기 화폐인 주화가 균일하지 못한 데에서도 기인한다. 당시 주화는 그 크기와,무게,금이나 은의 함량 등이 지역,주조시기 등에 따라 서로 달랐으며 위조 또한 성행하였다. 때문에 신뢰하기 어려운 주화를 근거로 하여 거래하는 데는 문제가 많아 상인들은 점점 신용거래에 의존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은 자금의 보관과 결제 업무에 이어 자연스럽게 대출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초창기 은행 역할을 해오던 이들은 상인들이 직접 막대한 자금을 직접 들고 돌아다니며 상거래를 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자금의 대부분을 맡기고 자신들이 발행해 주는 보관증서를 근거로 거래하는 것을 휠씬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상인들이 보관해 둔 자금을 바탕으로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대출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때로는 상인들에게 물건이 판매되기 전에 물건을 담보로 잡고 자금을 융통해 주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거래로 발생한 자금뿐만 아니라 여윳돈을 굴리길 원하는 사람들도 돈을 가져와 대출금으로 사용해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은행이 지급준비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대출 업무에 이용하여 신용을 창출하는 행위와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
초창기 개인들에 의해 설립되어 활동한 은행들은 19세기 초의 경기침체기를 거치면서 파산하게 된다. 은행의 파산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믿고 맡길 수 있는 즉 신뢰할 수 있는 은행에 대한 요구가 더욱 커지게 된다.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여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은행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 여러 사람이 출자하여 대규모의 자본금을 갖춘 회사 형태의 은행들이 출범하거나 소규모의 개인은행들이 합병하여 대규모 은행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은행의 대규모화는 가능한 대출 금액의 규모도 키우게 되어 산업과 기업의 대형화에 기여하게 된다.
규모가 커진 은행들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비약적으로 커진다. 대형화된 은행에서 수행하는 대출 관련 업무는 시중의 통화량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는 다시 투자,소비 등의 경제활동과 물가와 이자율 등의 경제 환경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부가 경제정책과 금융감독기관 등을 통해서 직·간접적으로 은행의 경영과 운영 방식을 통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경제활동 부분에서 은행의 역할과 비중이 점차 중요해짐과 동시에 은행이라는 직장과 은행 관련 업무라는 직업에 대한 관심도 함께 고조되어 왔다.
우리는 흔히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은행원’이라고 통칭한다. 은행원이라는 직업은 전통적으로 높은 급여 수준과 복리후생, 그리고 쾌적한 근무환경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직업이었다. 하지만 은행원의 업무 환경은 급변하는 은행 업무 내용 변화로 인해 크게 변화해 왔다.
먼저 은행원의 상당수는 은행 지점에서 직접적인 고객 금융 서비스 업무를 수행한다. 과거에는 지점에서 일하는 은행원들도 직급에 따라 현격히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상이한 업무의 성격으로 인해 자리 역시 크게 3 분류로 구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은행업무 처리가 전산화되면서 사실상 지점에 있는 모든 은행원이 직접적인 고객 지원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과거 은행 지점장 등이 수행하던 금융업무의 관리 감독 기능은 현재는 본사에서 직접적으로 관할 하고 있다. 이 역시 은행 업무가 전산화되기 이전에는 현장에서 직접 결정을 해야 했던 업무였지만, 은행 업무가 전산화됨에 따라 본사에서 직접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업무 환경의 변화로 인해 은행원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덕목은 고객 지원 능력이 되었다.
은행원 업무 중 고객 지원 업무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서 근무 시간 역시 변화하였다. 은행 창구 업무가 통상적으로 4시 마감이기 때문에 은행원의 직접적인 업무는 4시에 마감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최근에는 은행들의 신규 고객 유치를 위한 경쟁 속에서 주말 이용 고객 내지 퇴근 이후 이용 고객을 위해 근무 시간이 연장되는 지점들도 많다고 한다.
2015년 반기보고서 기준으로 상반기 신한은행의 직원 1인 평균 급여액은 4700만원으로 집계되었다. 특히 6개 시중은행 중 가장 높은 급여 수준을 기록했다. 뒤이어 씨티은행(4500만원), 외환은행(4300만원), 국민은행(3900만원), 우리은행 (3900만원), 기업은행 (3600만원), 하나은행(3400만원) 순으로 나타났다. 평균 근속 연수 또한 15년 이상인 것으로 들어나, 고용 불안정성이 높은 여타 분야의 최근 상황을 고려할 때 여전히 은행원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직업 중 하나이다.
최근 여타 직종의 급여 수준을 고려할 때 높은 급여 수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2002년 2분기 4842개였던 전국 은행지점은 2008년 4분기 5725개로 정점을 찍은 후 꾸준히 하락해 올 들어 5442개로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지점 수 관련 수치 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망의 대상인 은행원이 되는 길은 점점 좁아지는 듯하다.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