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27)
(25) 15세기 조선의 얼굴, 분청사기
(26) 서원과 향약의 나라 조선
(28) 광해군의 두 얼굴
(29)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30)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시작돼 그가 죽음으로써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이 전쟁이 시작되기 1년 전부터 직감적으로 전쟁을 예감하고 준비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물러가는 일본군에 결정타를 가했지만 안타깝게 산화한 영웅이 있습니다. 23전 23승의 전승을 올린 인물, 바로 성웅 이순신입니다.(25) 15세기 조선의 얼굴, 분청사기
(26) 서원과 향약의 나라 조선
(28) 광해군의 두 얼굴
(29)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30)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조선의 상식을 실천한 이순신
이순신에 대해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은 조선의 상식을 곧이곧대로 실천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전라 좌수사로 임명되기 전, 한때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다 중과부적으로 밀리게 됩니다. 상관에게 추가 병력 지원을 요청하지만 상관이 이를 묵살했고, 나중엔 적장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백의종군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상황에서 거리낌없이 당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도 그 백의종군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죠.
어릴 적 친구였던 유성룡이 그를 늘 칭찬하고 추천하자,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가 그를 만나기를 청합니다. 그때도 이순신은 같은 문중(덕수 이씨)이지만 율곡 이이가 당시 이조판서, 즉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라 만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문중이라 출세하게 된다는 둥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요. 임진왜란 중 원균의 오판과 모함, 그리고 일본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고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될 때는 상황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마침 그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게 됐기 때문이에요. 그는 억울함과 슬픔을 모두 가슴에 안고 전쟁터로 향합니다. 그것이 그가 지켜야 할 상식선이었으니까요.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던 순간에도 그는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아직 전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순신은 상식선 이상의 지략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전쟁 중 영의정에 오른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 에는 그가 기풍이 있고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 데도 매우 능수능란하게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이순신의 20여 차례 승리 중 대표적인 것을 나열해 아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를 비교해 보면 그의 지략이 어땠는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회자되는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을 비교해 볼까요.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의 비교
한산도대첩은 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선 73척을 대파한 것으로 원래 이 왜선이 있던 거제의 견내량이 지형적으로 좁고 암초가 많아 왜선을 유인해 격멸하는 방식을 활용한 대첩이었습니다. 반면 명량해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원균이 적의 유인술에 빠져 거제 칠전량에서 전멸된 직후 남은 배 13척만 가지고 서해로 진출하려는 왜선 133척을 막아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한산도대첩과 달리 전남 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인 명량에서 오직 일자진을 형성해 일본 수군의 통과를 막아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전혀 반대의 상황에서 이순신은 한산도대첩 때 학익진을 통해 유인에 속은 왜선들을 겨냥해 각종 총통으로 무너뜨렸습니다.
명량해전에서는 13척의 배만으로 막아내야 하는 상황에 이순신이 최선두에 서서 왜선에 맞서는 한편, 급변하는 조류를 활용해 이를 감지하지 못한 왜선의 진형과 대오가 무너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하게 됩니다. 또한 적장을 죽임으로써 왜의 사기를 꺾고 각종 총통을 쏘면서 결국 승리를 일궈냅니다. 정반대의 상황에서 지리를 활용하고 적의 약한 점을 찾아내 공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승리의 원동력이자 이순신의 남다른 지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이 광해군과 인조 때도 살아 있었다면
이 외에도 원균과 달리 이름없는 병사들 한 명, 한 명을 가족처럼 여기며 그들을 똘똘 뭉치게 한 점, 그리고 그들이 승리를 위해 쏟아낸 각종 군사적 아이디어를 수용할 줄 아는 포용력까지 그는 분명 상식 이상의 지혜와 포용력을 발휘합니다. 그 작품이 바로 거북선이라고 할 수 있죠. 예전에 언급했듯 문헌상 조선 태종 때 이미 거북선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더욱 활용해 뛰어난 전투선으로 거듭나게 한 것은 이순신이자 그 휘하의 군관 나대용 등이었습니다. 문헌상의 한계로 거북선이 확실히 철갑선인지 아닌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거북선이 기존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했으며 매우 빠르게 그리고 매우 가까이 적선에 접근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에 ‘만약에’란 없지만 저는 마지막으로 이런 가정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만약에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광해군은 물론, 인조 때까지 조선의 국방력이 더욱 탄탄해졌을 것이고 훗날 병자호란 같은 치욕은 없었을 텐데 하고 말이죠. 이미 함경도에서 기병이었던 여진족을 물리친 경험과 임진왜란에서 거북선을 이끌고 왜 수군을 막은 경험이 있었기에 말이에요. 반대로 그 경험과 군사력을 이후에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어쩌면 결국 17세기 또 한 차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식과 지략의 실천, 이순신 장군이 후대에 준 가르침을 제대로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