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22)

(19) 공민왕, 반원 자주 개혁을 내걸다
(20)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
(21) 14세기 수월관음도, 고려 회화의 백미
(23) 세종, 민본 정치를 보여주다
(24) 꿈속에서 도원을 노닐다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헌릉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헌릉
벌써부터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의 초입, 저는 조선의 왕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왕이자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 한 왕의 무덤을 찾아 왔습니다.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16세에 이미 과거 급제를 하였고, 33세에 왕이 되어 조선을 호령한 왕, 바로 태종 이방원입니다. 그의 무덤인 헌릉 앞에는 무인석과 문인석이 각각 쌍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과 호랑이, 말 모양의 돌로 만든 조각상이 함께 이 헌릉을 지키고 있지요.

왕권과 신권의 대립, 그리고 이방원의 불만

조선 태종 헌릉 신도비
조선 태종 헌릉 신도비
조선은 정도전 등 성리학을 이상으로 여기는 급진파 신진 사대부들이 신흥 무인 세력의 수장이었던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성립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이른바 사대부 사회와 그 위에 왕이 있는 안정적 지배체제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의 지배층이 지방 호족에서 문벌 귀족, 무신과 권문세족을 지나 신진사대부까지 다양하게 변화했던 것과는 다르지요. 간단하게 ‘왕+양반’이 국가를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왕과 양반 지배층 사이에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왕의 말이 곧 법이요 정의인 시대에 왜 그처럼 어렵게 보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짐이 곧 국가’라과 외친 루이 14세의 절대 왕정과 같은 강력한 왕권이 설정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은 왕권을 가진 조선의 왕은 사실 얼마되지도 않았지요.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합의한 단 한가지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유교적 이상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었지요. 누가 그 국가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갈 것인지는 확실하게 못 박지 않았습니다.

정도전의 구상은 이른바 ‘재상 총재’입니다. 왕은 성인군자와 같은, 또는 천체의 북극성처럼 밝게 빛나는 존재이자 우주의 중심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실제 유교적 가치인 ‘인(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능력이 출중한 재상의 몫이라는 것이지요. ‘일인지하 만인지상’ 즉, 재상은 위로 왕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솔하며 만백성을 직접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격변기와 외세의 침략이 빈번한 시기에는 이성계와 같은 무장이 매우 중요하지만 국가를 세우고 질서를 바로잡은 이후에는 유교적 문사(文士)가 실질적인 통치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가 바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자 세종 대왕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태종 이방원이었습니다. 그는 정도전의 ‘재상 총재’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임금의 역할이니까요.

조선의 최고 권력은 왕이다?

특히 이방원은 자신이 개국 공신에서 제외되고,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태조 이성계의 8번째 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됩니다. 정도전 스스로 권력화되어 가고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도를 넘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결국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이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하였고, 2차 왕자의 난 이후 조선의 3대 왕에 즉위하게 됩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대적 개혁에 나서게 됩니다. 정도전이 추진하였던 재상 중심의 정치가 아닌 왕권 강화가 그 핵심이었지요.

태종은 제도 개혁을 단행해 6조 직계제를 실시합니다. 이것은 기존에 의정부의 재상들이 재상권을 통해 행사하던 정책 수립 권한을 왕이 직접 행사하면서 6조가 바로 왕에게 국정을 보고한 후 왕이 결정하여 곧 시행하게 하는 제도인데요. 이제 태종은 조선의 국왕이 곧 국가이며 모든 것임을 만천하에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지요. 또한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처남인 민씨 형제를 과감히 제거합니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지향한 태종

[한국사 공부] 조선의 기틀을 확립한 태종
단, 태종이 무조건 숙청만 일삼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앞서 언급하였듯 성균관에서 수학한 성리학자 출신이기도 합니다. 유교적 이상향을 지향한 국왕이었지요. 그래서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여 국가가 관리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안정적으로 지세를 거둬 국가의 경제 기반을 안정시켰습니다. 또한 호패법을 실시하여 조선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였으며 농업을 장려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하였지요. 또한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들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했을 때 이를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창구를 마련하였습니다. 중앙 부서에서는 사간원을 독립시켜 왕의 언행이나 정책에 잘못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간쟁을 고하도록 하였지요. 이 또한 유교적 정치를 안착시키려는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포함시킨 세계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으며, 주자소를 설치하고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어 유교 서적의 출판과 간행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의 역사서인 『태종실록』에는 태종이 이미 귀갑선, 즉 거북선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그의 개혁 정치와 문화 정책이 밑바탕이 되어 다음 시기 세종 대왕의 찬란한 통치가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