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16)
(14) 지금 내 옆에는 누가 있나?
(15) 역발상으로 국가를 지키다
(17) 김윤후, 몽골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
(18) 충선왕을 따라 중국 유람한 유학자 이제현
(19) 공민왕, 반원 자주 개혁을 내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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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공부] 송나라 사신이 감탄한 고려청자](https://img.hankyung.com/photo/201505/01.9936964.1.jpg)
고려 문벌귀족문화의 극치, 12세기 청자
우리나라 청자는 10세기 후반 고려 광종 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중국의 청자와 그 제작 기술을 받아들이기 쉬운 경기 일대에서 가마터와 청자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광종 때는 중국에서 도입한 과거제도가 시행되지요. 고려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며 체제 정비에 나선 것입니다. 능력있는 인물이 관료가 되었으며, 5품 이상 관료의 자손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던 음서제와 함께 과거제는 문벌귀족사회 성립의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문벌 귀족들은 왕과 함께 청자를 향유하는 주된 소비자가 됩니다. 그 정점이 바로 인종과 의종 때지요. 12세기 인종의 무덤인 장릉에서 발견된 청자참외형꽃병이나 청자복숭아형연적, 청자투각칠보문향로 등에서 당시 문화 수준과 청자의 ‘비색’을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청자가 유행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아주 진귀한 푸른 옥으로 만든 완(사발)은 매우 비싸고 쓰기도 아까울 정도였는데 청자가 제작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지요. 푸른 옥처럼 신비한 빛을 내면서도 상대적으로 대량 생산도 가능해지면서 주요 구매자였던 왕족과 문벌 귀족의 소비재이자 예술품으로 주목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질그릇 생산 전통 속에서 중국 송의 기술이 더해져 순수 청자 혹은 비색 청자가 12세기에 최고조로 발달하였으며, 13세기에는 상감기법이 독자적으로 개발되어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이를 반영하듯 1157년께, 즉 고려 의종 때는 아예 청자기와가 제작되기까지 합니다.
개경 만월대를 수놓은 청자기와
![고려 청자기와](https://img.hankyung.com/photo/201505/AA.9916743.1.jpg)
상감청자를 발전시킨 최씨 무신정권
그렇다면 의종의 죽음과 함께 고려청자의 운명도 다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히려 더 독자적인 한국적 미를 발산하게 됩니다. 청자의 표면에 음각으로 무늬를 만든 뒤 백토나 자토를 붓으로 바르고 초벌구이를 합니다. 그리고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로 화려한 상감청자가 탄생하지요. 이를 통해 도교적이면서 불교적인 상징으로 읽을 수 있는 구름과 학 또는 자연적인 것을 상징하는 들국화가 장식무늬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최씨 무신정권에서 정방을 설치하고 인사권을 좌지우지했던 최우나 그의 아들 최항의 무덤에서 다양한 고려청자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무신정권에서 오히려 상감청자라는 독자적 기법과 예술적 형태로 청자는 더 발전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제작 장소도 강진에서 최씨 무신정권의 지원을 받는 부안으로 바뀌게 됩니다.
![[한국사 공부] 송나라 사신이 감탄한 고려청자](https://img.hankyung.com/photo/201505/AA.9552022.1.jpg)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