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16)
(14) 지금 내 옆에는 누가 있나?
(15) 역발상으로 국가를 지키다
(17) 김윤후, 몽골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
(18) 충선왕을 따라 중국 유람한 유학자 이제현
(19) 공민왕, 반원 자주 개혁을 내걸다
1123년 중국 북송에서 고려로 온 사신 서긍은 개경에 머물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그림이 곁들여진 책을 만듭니다. 여기에 고려청자에 대해 언급하면서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한다”고 하였지요. 한마디로 진귀한 비취옥과 같은 색깔을 낸다는 칭찬입니다. 이와 더불어 “근래에 와서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 좋아졌다”며 살짝 시샘어린 칭찬을 하였지요. 한편 남송대에 간행된 『수중금』이라는 서적에서는 청자로 천하 제일의 명품은 고려청자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자, 이번 글에서는 고려 최고의 예술인 청자를 통해 고려의 흥망성쇠를 함께 알아 볼까 합니다.(14) 지금 내 옆에는 누가 있나?
(15) 역발상으로 국가를 지키다
(17) 김윤후, 몽골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
(18) 충선왕을 따라 중국 유람한 유학자 이제현
(19) 공민왕, 반원 자주 개혁을 내걸다
고려 문벌귀족문화의 극치, 12세기 청자
우리나라 청자는 10세기 후반 고려 광종 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중국의 청자와 그 제작 기술을 받아들이기 쉬운 경기 일대에서 가마터와 청자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광종 때는 중국에서 도입한 과거제도가 시행되지요. 고려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며 체제 정비에 나선 것입니다. 능력있는 인물이 관료가 되었으며, 5품 이상 관료의 자손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던 음서제와 함께 과거제는 문벌귀족사회 성립의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문벌 귀족들은 왕과 함께 청자를 향유하는 주된 소비자가 됩니다. 그 정점이 바로 인종과 의종 때지요. 12세기 인종의 무덤인 장릉에서 발견된 청자참외형꽃병이나 청자복숭아형연적, 청자투각칠보문향로 등에서 당시 문화 수준과 청자의 ‘비색’을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청자가 유행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아주 진귀한 푸른 옥으로 만든 완(사발)은 매우 비싸고 쓰기도 아까울 정도였는데 청자가 제작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지요. 푸른 옥처럼 신비한 빛을 내면서도 상대적으로 대량 생산도 가능해지면서 주요 구매자였던 왕족과 문벌 귀족의 소비재이자 예술품으로 주목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질그릇 생산 전통 속에서 중국 송의 기술이 더해져 순수 청자 혹은 비색 청자가 12세기에 최고조로 발달하였으며, 13세기에는 상감기법이 독자적으로 개발되어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이를 반영하듯 1157년께, 즉 고려 의종 때는 아예 청자기와가 제작되기까지 합니다.
개경 만월대를 수놓은 청자기와
이 청자기와는 전남 강진에서 제작되어 개경 만월대에 사용될 정도였습니다. 고려청자로 지붕을 뒤덮은 궁궐, 상상만 해봐도 찬란하게 눈부실 정도지요.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1157년을 전후하여 서서히 상감기법의 청자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만큼 의종은 놀라울 정도로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난 왕이었으며, 그 시기 청자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킬 만큼의 예술적 안목이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그것은 곧 의종의 몰락과 문벌귀족사회 붕괴의 전조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였던 인종대에 외척인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고, 묘청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문벌귀족사회는 흔들리고 있었지요. 그러다 1170년 의종이 보현원으로 행차할 때 무신정변이 터지고 맙니다. 당시 무신들은 “문신의 관을 쓴 이는 비록 말단 관리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치며 정변을 일으킵니다. 청자를 애호했던 의종은 왕권에서 쫓겨나고 3년 뒤 죽임을 당합니다.
상감청자를 발전시킨 최씨 무신정권
그렇다면 의종의 죽음과 함께 고려청자의 운명도 다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히려 더 독자적인 한국적 미를 발산하게 됩니다. 청자의 표면에 음각으로 무늬를 만든 뒤 백토나 자토를 붓으로 바르고 초벌구이를 합니다. 그리고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로 화려한 상감청자가 탄생하지요. 이를 통해 도교적이면서 불교적인 상징으로 읽을 수 있는 구름과 학 또는 자연적인 것을 상징하는 들국화가 장식무늬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최씨 무신정권에서 정방을 설치하고 인사권을 좌지우지했던 최우나 그의 아들 최항의 무덤에서 다양한 고려청자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무신정권에서 오히려 상감청자라는 독자적 기법과 예술적 형태로 청자는 더 발전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제작 장소도 강진에서 최씨 무신정권의 지원을 받는 부안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뒤 최씨 무신정권은 몽골의 침략에 맞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쟁을 펼치다 결국 무너졌고 고려 조정은 몽골과 강화를 맺습니다. 이와 함께 고려청자도 서서히 퇴조하게 됩니다. 원의 요구에 맞춰 중국식 무늬로 장식하기도 하지만 당시 친원파가 주를 이뤘던 권문세족의 등장과 그들이 청자에 대해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게 되면서 결국 청자는 특정 무늬가 패턴화되어 나타나면서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조선에서 분청자(분청사기)와 백자에 그 예술적 지위를 양보합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