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15)
(14) 지금 내 옆에는 누가 있나?
(16) 송나라 사신이 감탄한 고려청자
(17) 김윤후, 몽골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
(18) 충선왕을 따라 중국 유람한 유학자 이제현
(19) 공민왕, 반원 자주 개혁을 내걸다
완연한 봄날이라지만 아침부터 흐릿한 하늘에 결국 봄비가 한두 방울 떨어집니다. 그래도 길은 잘 뚫려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경기 여주로 접어들었습니다. 어디로 가냐고요?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고려 최고의 지략가이자 역발상으로 나라를 지킨 외교가 서희의 역사적 발자취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여주시 산북면에 있는 서희 장군 묘로 향하고 있습니다.(14) 지금 내 옆에는 누가 있나?
(16) 송나라 사신이 감탄한 고려청자
(17) 김윤후, 몽골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
(18) 충선왕을 따라 중국 유람한 유학자 이제현
(19) 공민왕, 반원 자주 개혁을 내걸다
고려 최고의 지략가 서희를 만나러 가는 길
여러분 중에는 벌써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서희 장군? 외교가라면 문신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네, 맞습니다. 서희는 분명 문신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과거제를 시행한 광종 때 서희도 과거 급제하였거든요. 그리고 고려 전기 중에서도 가장 안정되었던 성종 때의 정치가입니다. 그럼 왜 알림판에는 ‘서희 장군 묘’라고 되어 있을까요? 추측건대 그가 거란을 물리친 역사적 사건과 그 이미지 때문에 ‘장군’이라고 한 것 같아요. 사실 서희는 고려 최고 관직 중 하나인 정1품 ‘태보’까지 올라갑니다. 고려 시대 무인이 정3품 상장군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그는 문신입니다. 더구나 그는 칼이 아니라 세 치의 혀, 즉 뛰어난 언변과 외교술로 거란을 물리치고 고려의 영토를 늘리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과연 그는 어떤 외교 전술로 이러한 성과를 올렸던 걸까요?
먼저 10세기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동아시아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10국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거쳐 한족이 송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난 호에서 보았듯 후삼국의 혼란기를 지나 고려가 수립된 상황이었고요. 그런데 이와 동시에 북방 유목 민족도 성장할 때였습니다. 이미 송나라보다 먼저 거란족의 요나라가 만리장성 이남까지 영역을 확보한 상황이었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까지 이 요나라가 압박을 가하고 있었어요. 또한 동북쪽으로는 여진족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993년 거란족의 요나라는 고려가 송나라와 교류하며 자신들을 고립시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장수 소손녕과 그를 따르는 80만 대군을 보내 침공에 나섭니다. 그런데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송나라와의 교류를 튼 것도 사실 서희의 공적 중 하나였습니다. 어쨌든 요나라의 침공과 그 병력에 놀란 고려 조정은 대책회의를 열고 어떻게 막을 것인지 갑론을박하게 됩니다.
혈혈단신으로 거란의 진영을 찾아간 서희
당시 고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왕이 직접 나가 항복하자는 것이고 아니면 서경 북쪽의 땅을 거란에게 주어 달래자는 의견입니다. 둘 다 고려 입장에서는 굴욕적일 수밖에 없는 방안이었지요. 당시 왕이었던 성종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다수의 의견에 따르려 했지요. 이때 서희가 나서 새로운 제안을 하게 됩니다. 먼저 한 번이라도 싸워본 다음에 정하자는 것이었지요. 마침 그의 말처럼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가 작은 승리를 거두자 요나라도 내심 마음이 급하게 됩니다. 이를 숨기며 고려의 항복을 독촉하는데 서희가 곧 그 속내를 간파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성종에게 단순히 요의 군대가 대군이라는 것에 먼저 겁을 먹을 필요는 없으며, 당시 신흥 세력인 여진족을 치기 위해 함께 연합하자는 역제안을 하게 되면 분명 요의 군대를 물리치고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곧 서희는 성종의 국서를 지니고 요나라 소손녕의 장막으로 들어가 직접 담판에 나섭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주장
전쟁과 협상의 목적은 동일하게도 최대한의 이익을 남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협상에서도 전쟁만큼 기선 제압이 중요합니다. 소손녕은 서희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큰 절을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서희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지요. 신하가 왕에게 절을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양국의 대신이 만나는 자리에 절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리적 비판이었지요. 소손녕은 기선 제압에 실패하였지만 본 협상에서는 나름의 논리로 고려를 압박합니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며, 따라서 옛 고구려 땅은 당연히 요나라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아닌 한족의 나라 송과 교류 관계를 지속하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면서 고려가 땅을 요나라에 바칠 것과 국교를 맺을 것을 강요하였지요.
서희는 곧 반박에 나섭니다. 고려는 당연히 고구려의 후예이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으며 따라서 옛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고 말이지요.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었는데 북진 정책의 의지로 서경, 즉 평양을 중시한 것을 강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또한 압록강 부근도 원래 고려의 땅인데 여진족이 점령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송나라와 교류한다고 변론을 했지요. 따라서 요나라와 고려가 연합하여 남북으로 여진을 공격한 후 교류를 하자는 제안을 내놓습니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의 논리적 비판과 당시 국제 정세를 파악한 제안에 설득당해 이를 수용하고 철군을 하게 됩니다.
고려는 다음 해인 994년 여진을 물리치고 흥화진(의주)부터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 등 이른바 ‘강동 6주’를 개척하게 됩니다. 상대방의 의중을 꿰뚫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서희, 그의 뛰어난 외교력은 우리 역사상 대표적인 실리 외교의 성과로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