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선택 시각으로 본 사회 (5) 국회선진화법과 정치실패
찬반의견 첨예하게 엇갈려도 꼭 필요한 법은 어떻게든 입법
국회 품위를 잃을 뿐이었지만…
민생법안 방치·경제 타격…막대한 의사결정 비용·시간…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지난해 5월, 5개월간 문을 닫고 단 한 건의 법안도 처리하지 못한 ‘식물국회’의 출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민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국회라는 지탄을 받았던 국회의 이 파행적 운영의 배경에는 많은 이들이 지목한 대로 ‘국회선진화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찬반의견 첨예하게 엇갈려도 꼭 필요한 법은 어떻게든 입법
국회 품위를 잃을 뿐이었지만…
민생법안 방치·경제 타격…막대한 의사결정 비용·시간…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회선진화법은 식물국회의 출현을 조장한 제도적 배경이자 원인이다. 국회선진화법은 여야 간 또는 국회의원들 간 물리적 충돌 상황, 즉 ‘동물국회’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한 국회법 개정안이다. 소수의 의견을 최대한 보호해야 한다는 선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찬성을 통해 안건 처리가 불가하도록 국회의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을 변화시켜, 종내에는 정치시장의 융통성을 망가뜨리고 식물국회의 출현을 발생시켰음에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 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식물국회의 출현이라는 결과만으로는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규범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사안에 따라서는 식물국회 출현이 당연한 결과이고 바람직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동물국회의 방지를 위해 국회선진화법이 도입돼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가장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여겨지는 미국의 앨라배마 주의회에서도 2007년 공화당과 민주당 간 의견 갈등이 상원의원들 간 주먹다짐으로 번지는 등 동물국회는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에서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다. 소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식물국회를 출현시켜야 할 때와 동물국회가 초래되더라도 다수의 의견만으로 빠른 집단적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의 구별 및 규범적 평가를 가능케 하는 정치경제학적 분석기반을 확립한 학문이 바로 공공선택학이다.
1986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뷰캐넌과 공저자 고든 털럭은 현대 공공선택학의 근간을 마련한 저서 ‘국민 합의의 분석’을 통해 ‘집단적 결정 방식’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집단적 의사결정 과정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회적 비용, 즉 ‘의사결정비용’과 ‘외부비용’이 수반된다. 의사결정비용은 안건 처리를 놓고 다수의 동의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비용이다. 외부비용은 안건이 처리됐을 때 반대하는 구성원이 감수해야 할 피해나 불이익을 의미한다. 따라서 집단적 의사결정을 위해 요구되는 동의의 표가 늘어날수록 의사결정비용은 늘어나고 외부비용은 감소한다. 이들은 두 비용의 합을 집단적 의사결정에 소요되는 사회적 총비용이라고 부르며, 사회적 총비용을 최소화하는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의 채택을 ‘최적의 선택’으로 진단했다.
뷰캐넌과 털럭이 분석한 바와 같이 소수에 속하더라도 경미한 피해가 예상되거나 즉각적인 결정이 요구될 때는 소수의 동의만으로도 집단적 결정이 허용된다. 그러나 사유재산권이나 인권 침해가 예상되는 등의 중대한 사안에 대한 결정에는 ‘가중다수결의 동의’가 요구된다. 이런 특징은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정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안의 시급성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의견을 보호한다며 왈가왈부했다면 미국은 2차대전에서 패했을 것이다.
뷰캐넌과 털럭의 분석을 토대로 국회선진화법을 바라보면 이 개정안이 왜 식물국회를 야기한 원인으로 지목되는지, 왜 개정이 필요한지 금방 드러난다. 우선 국회선진화법은 논의되는 안건의 중대성은 무시하고 국회 내 거의 모든 의사결정에 60% 이상이란 가중다수결의 동의를 요구한다. 이는 안건의 중대성에 근거해 집단적 의사결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다양한 의사결정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다. 국회선진화법 도입 전에는 다수의 합의만으로 각종 안건을 신속 처리했던 국회가 이젠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하며 식물국회로 전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국회선진화법의 또 다른 문제점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을 제한하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의장의 직권상정제도는 안건 처리가 무기한 지연되는 사태로 인해 발생되는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다. 하지만 교섭단체 대표의 합의가 없는 의장의 직권상정을 불가능하게 해 어쩔 수 없이 식물국회로 인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국회선진화법의 근본적 문제는 ‘절차적 오류’에 있다.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의 의사결정 방식 자체를 변경하는 개정안임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국회법, 즉 ‘과반의 동의’란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는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의 결정이나 변경과 같은 헌법적 요소를 개정하는 사안에는 가중다수결의 동의나 만장일치가 요구돼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절차적 오류로 인해 국회선진화법은 소수에 의해 다수가 지배당하는, 즉 소수의 지지만으로 선출된 독재자의 해임을 위해 다수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과반수 동의라는 방식으로 통과된 국회선진화법 개정을 위해서는 60%라는 가중다수결의 동의가 요구되는 웃지 못할 결과는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 변화와 결정이 얼마나 중대하며 헌법 수정에 상응하는 의사결정인지 방증하기도 한다.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그동안 우리 사회가 치러야 했던 사회적 비용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이며 그 부작용은 점차 심화될 것이다. 하지만 국회선진화법은 흔히 얘기되는 것처럼 다수결 혹은 과반수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개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과반수와 다수결 원칙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안건의 중대성에 따라 적용되는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도 다양해야 한다는 근본적 원칙에서 벗어나 일괄적으로 모든 안건에 가중다수결의 동의를 요구했고, 절차적 오류로 인해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라는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에 국회를 퇴보시킨 개정안이며 식물국회란 정치 실패를 가져온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윤상호 < 한국경제연구원 공공정책연구실 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