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왼쪽부터)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59년 만에 미국과 쿠바 정상이 마주앉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지난 11일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에서 열린 미주기구(OAS) 정상회의에서 만나 한 시간 넘게 회담을 했다. 1956년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만난 뒤 처음이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정상회담은) 역사적인 만남”이라며 “구시대의 한 장을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카스트로 의장 역시 “오바마 대통령의 표현대로 진전을 이룰 것”이라고 화답했다.

오바마 태어나기 전부터 단절된 美-쿠바

미국과 쿠바의 악연은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지지를 받던 풀헨시오 바티스타 당시 쿠바 대통령이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에 의해 축출되면서부터다. 카스트로 혁명군이 권력을 잡고 먼저 한 일은 10억달러(약 1조900억원) 규모의 미국 소유 재산을 몰수한 것이었다. 1960년 1월 미국은 쿠바와의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1961년 8월생. 그가 태어나 자라는 내내 미국과 쿠바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1961년 4월 카스트로는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포했다. 다음날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 축출을 위해 쿠바 출신 망명자 1500여명을 쿠바 남해안의 피그만으로 몰래 보냈다. 일명 ‘피그만 침공’이다.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대원들은 대부분 죽거나 체포됐다.

미국은 경제 제재로 쿠바의 목을 조였다. 1962년 미국은 쿠바에 대해 수입 금지조치를 내리고 미주기구(OAS)에서 쿠바를 내보냈다. 같은 해 옛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 중이라는 게 확인되면서 양국은 핵전쟁 직전까지 갔다. 핵전쟁 우려는 양국이 한 발씩 물러서면서 일단락됐다. 소련은 쿠바로 보내려고 터키에 배치했던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1982년에는 콜롬비아 좌익 반군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쿠바가 미국의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다.

1991년 옛 소련이 붕괴되자 쿠바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 수위를 높였다. 1992년 미국은 쿠바에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를 제재한다는 내용이 담긴 토리셀리법을 제정했다. 1996년에는 쿠바와 거래하는 외국 기업의 경영진과 주주 그리고 그 가족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법인 헬름스-버튼법을 만들어 경제 제재를 강화했다.

미국이 꼬인 관계 푸는 이유

오바마 대통령이 1960년 국교 단절 이후 꼬여왔던 쿠바와의 관계를 풀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남미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중국 때문이다. 니카라과는 지난해 태평양과 카리브해를 잇는 새 운하 건설을 시작했다. 운하 건설은 중국 통신장비 제조업체 신웨이공사의 왕징 회장이 설립한 홍콩니카라과운하개발(HKND)이 주도하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중국이 급속도로 중남미에 접근하는 데 미국이 조바심을 느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임기가 2년 남은 오바마 대통령의 ‘업적 쌓기’라는 시각도 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비롯해 미국 대선 잠룡들이 속속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는 상황에서 임기 말 권력누수현상(레임덕)을 고민하는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를 자신의 성과로 남기고 싶어한다는 분석이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 역시 임기를 2년 남겨둔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해 미·중 관계가 급격히 변화한 적이 있다.

테러지원국 해제, 양국 관계 급물살

정상회담이 이뤄진 지 사흘 만에 미국 정부가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기로 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14일 의회에 서한을 보내 “쿠바 정부는 6개월 동안 국제적으로 어떤 테러지원 행위도 하지 않았다”며 “앞으로도 쿠바가 테러지원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쿠바는 미국 의회의 검토 기간 45일이 지나면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된다.

쿠바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는 미국과 쿠바가 진행해온 국교정상화 협상의 최대 쟁점 중 하나. 블룸버그 등 외신은 정상회담 직후 미국과 쿠바가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에서 이견을 보였다며 양국의 관계가 더디게 변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예상보다 이 문제가 빠르게 해결됨에 따라 양국 간 관계 정상화에 더욱 힘이 실릴 전망이다. 양국은 쿠바 관타나모에 있는 미군기지 철수, 쿠바에 대한 미국의 금수조치 해제, 대사관 재개설 등 현안을 남겨두고 있다.

나수지 한국경제신문 기자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