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9)
(8) 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10) 진흥왕, 한강을 차지하다
(11) 뉴욕으로 날아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12) 원효와 의상, 서로 다른 길을 가다
(13) 발해는 결코 중국사가 될 수 없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딱 들어맞는 예 중 하나가 바로 김치이지요. 중국이 원산지인 배추, 게다가 아메리카 작물인 고추를 가루로 만들고 버무려 발효시킨 김치는 우리 고유의 음식이자 세계적인 맛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바로 문화 교류와 창조의 역사가 엿보입니다. 애초부터 우리 것이 아니라도 교류를 통해 배추와 고추를 받아들여 우리만의 독창적 음식으로 재탄생시킨 것이지요. 저는 이런 문화 교류와 재탄생의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라의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박혁거세와 석탈해 그리고 김알지(8) 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10) 진흥왕, 한강을 차지하다
(11) 뉴욕으로 날아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12) 원효와 의상, 서로 다른 길을 가다
(13) 발해는 결코 중국사가 될 수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백제보다 훨씬 먼저 탄생한 국가, 그런데 중국 문물은 상대적으로 가장 늦게 받아들인 국가이지요. 그래서 지증왕 이전까지는 왕을 뜻하는 남다른 용어를 쓰기도 합니다. 존귀한 사람을 칭하는 '거서간', 제사장이자 무당인 '차차웅',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 그리고 말뚝 또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지요. 예를 들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혁거세 거서간'으로 불립니다. 왕 또한 박, 석, 김씨의 세 집단이 번갈아 맡기도 했지요. 말이 울고 있던 자리에 있던 커다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부터, 알에서 태어나 궤짝에 실려 바다로 건너온 석탈해, 황금 상자 안에서 나온 김알지 등이 바로 그 시조들입니다. 그런데 신라는 4세기 내물마립간부터 김씨 세력만이 왕이 됩니다. 또한 이때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 후 6세기 초 지증마립간이 중국식 왕호를 쓰고, 법흥왕때부터 진덕여왕 때까지는 불교식 왕명을 씁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김춘추, 즉 무열왕부터는 유교식 왕명을 채택하지요.
왜 갑자기 장황하게 신라의 왕명과 왕위에 올랐던 집단에 대해 말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면 신라의 동서교류 영향을 좀 더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신라의 찬란한 황금 문화가 바로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산(山)또는 여기서 파생된 출(出)자 모양 금관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시기가 주로 김씨만의 독점적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며 동시에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쓰이던 5~6세기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한국적이며 가장 세계적인 신라 금관
이 금관은 신라만의 독창적인 기술로 창조된 예술품이자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통 이해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아프카니스탄이 있는 중앙아시아의 중간 위치에 존재한 고대 박트리아의 금관과 조형적으로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단순히 모방했다는 건 아닙니다. 분명한 건 양식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이 고대 박트리아라는 국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퍼트린 헬레니즘 문명을 동으로 전파했으며 반대로 동쪽의 스키타이나 흉노 등 유목민족의 문화를 서쪽으로 연결하는 문명의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신라의 금관에도 유목민족 문화의 영향이 살짝 보입니다. 경주 노서동 서봉총의 금관에는 유목민족이 신령스럽게 여긴 사슴의 뿔과 같은 장식이 좌우로 있으며, 봉황 같은 새 문양도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유목민족이 만들었다거나 신라 김씨 왕족이 그 출신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신라 경주 계림의 신령한 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니까요. 제 관점에서는 결국 신라의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위엄의 금관이 이렇게 동서문화교류 속에서 탄생한 창조물이라는 겁니다.
고대 동서교류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주로 유목민의 주무대였던 초원길. 이는 몽골 고원에서 고비사막 위를 지나 저 멀리 카스피해와 그 옆 흑해 연안까지 뻗어나갑니다. 둘째, 주로 중국의 비단이 수출되었다는 실크로드, 즉 비단길. 보통 중국의 시안(장안)에서 천산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거치고 중앙아시아를 관통하여 이란을 지나 곧 지중해와 로마까지 다다르는 길입니다. 셋째, 인도양과 홍해를 거쳐가는 바닷길. 중국의 동남해안에서 시작하여 인도양을 지나 페르시아만 또는 홍해를 거쳐 서아시아까지 갑니다. 비행기와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이렇게 지역과 국경을 넘어 세계는 서로 소통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속속들이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 초원길과 비단길 그리고 바닷길의 동쪽 끝은 중국이 아니라 바로 신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로 전해진 로만글라스
국보 193호이자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견된 봉수모양 유리병을 볼까요? 그리스와 로마의 포도주를 따르던 병 모양을 본뜬 이 유리병은 로마의 속주였던 시리아지역에서 제작되어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은 물론 신라까지 영향을 준 것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출토된 길이 36cm의 금제감장보검(보물 635호)은 비록 철제 칼은 부식되었지만 금선과 금 알갱이를 붙이는 이른바 누금세공기법이 보입니다. 이는 흑해 그리스 문화권에서 시작하여 사산조 페르시아를 거쳐 신라까지 전파된 기술이지요. 또한 손잡이 부분의 ‘P'자형과 아래 ’D‘자형의 패용장식구도 저 멀리 서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하였던 것입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은제 그릇의 뚜껑과 아래 그릇 끝 부분에는 각각 금으로 도금되어 있는데, 이마저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금속 공예 기법입니다. 한편, 미추왕릉 4호 무덤에서 발견된 길이 41.6cm의 유리목걸이(보물 634호)의 구슬에는 사람 얼굴과 새 그림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기법은 고대 인도네시아의 유리 공예 기술이 바닷길을 통해 신라로 전해진 것으로 최근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자, 이렇게 고대 신라에서는 특히 5~6세기에 걸쳐 동서문명 교류의 통로를 통해 화려한 금관과 다양한 금속 및 유리 공예품을 창조해 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신라의 고유한 문화는 어떤 형태로 서쪽으로 전해졌을까요? 자못 궁금해집니다.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