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5)
(3)고조선은 살아 있다
(4)하늘과 인간 연결해주는 솟대신앙…
(6)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린 장수왕
(7)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美
(8)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여러분에게 고구려는 어떤 국가인가요? 알에서 태어난 주몽,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당과 맞서 싸운 연개소문 등 강인하고 용맹한 영웅들이 이끈 고대 국가로 우선 기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처음부터 이렇게 강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그 지정학적 위치도 애매해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나당연합군에 의해 결국 멸망(물론 내부 분열도 있었지만)한 것처럼 샌드위치마냥 여러 국가로 포위될 수도 있는 위치였습니다. 실제 3세기에 중국 위나라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왕성이었던 환도성이 함락되었으며, 4세기에는 북쪽 선비족 일파가 세운 전연이라는 국가의 공격을 받아 미천왕의 무덤이 훼손되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아래쪽에서는 같은 부여 계통이지만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오히려 맹공을 퍼붓던 백제에 의해 4세기 후반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전사하기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고구려는 양쪽으로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공격에 그만 국가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졌지요. 당연히 옴짝달싹 못하고 제 한 몸 지키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 위기의 시기를 역으로 기회로 보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고구려를 중국도 감히 쉽게 넘보지 못하는 동아시아 강국으로 만드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누굴까요? 바로 여러분과 비슷한 나이인 18살에 왕이 되어 21년 동안 고구려를 통치한 광개토태왕입니다.(3)고조선은 살아 있다
(4)하늘과 인간 연결해주는 솟대신앙…
(6)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린 장수왕
(7)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美
(8)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역발상으로 위기 돌파한 광개토태왕
왜 세종대왕과 같은 ‘대왕’이 아니라 ‘태왕(太王)’ 즉 ‘왕중의 왕’이냐고요? 당연히 고구려인들 스스로 그렇게 불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중국에 남아 있는 광개토태왕릉비문에 그리고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청동그릇에 모두 ‘태왕’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살아서는 영락(永樂)대왕이라 자처하며 중국 황제의 연호를 거부한 왕이었으며 죽어서는 영토를 넓히며 나라를 안정시켜 백성들이 존경했던 왕중의 왕, 즉 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볼 점은 단지 그가 땅을 넓혔다는 것보다는 그런 영토 확장을 가능케 한 남다른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광개토태왕은 단순히 강력한 무기나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만으로 고구려를 최강 국가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우선하는 그만의 전략적 생각, 즉 발상의 전환을 통해 동아시아의 핵심이자 중심 국가로 고구려를 새롭게 디자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이 역사에 남긴 발상의 전환이란 무엇일까요?
더 이상 중국의 변방이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패배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도록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고구려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북으로는 유목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와 거란 등의 끊임없는 침입을 막아내기 바빴고 남으로는 강력한 백제의 침공 또한 견뎌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죽임을 당한 후 광개토태왕의 큰아버지인 소수림왕은 충격에 빠진 고구려인들을 달래며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치하며 율령을 반포하는 등 안정 지향적인 통치에 절치부심했지만, 불안한 고구려를 완전히 안정시키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된 광개토태왕은 과감한 역발상으로 이런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꿔버립니다. 단지 왕조를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변방에서 벗어나 그 중심 국가로 거듭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발상을 바탕으로 그는 ‘최고의 수비는 곧 공격’이라는 말처럼 과감하게 동서남북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는 정복 활동을 동시다발적으로 펼치게 됩니다. 사실 그의 정복은 도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는 곧 성공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10개 성을 점령하였으며, 북으로는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00명을 사로잡습니다.
이런 폭발적인 질주를 하면서도 광개토태왕은 그저 큰 땅을 차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전략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영토를 확장해 갑니다. 중국 대륙과 연결할 수 있는 통로인 요동반도와 만주 및 연해주 일부, 한반도에서 수륙 모두를 통해 중국와 일본까지 연결할 수 있는 한강 북부 일대,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와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는 동해까지 마치 부채를 펼친 것처럼 요충지를 쉴 새 없이 장악해 갑니다. 곧 북으로는 중국의 북연을 물리치고 거란을 정복하였으며 북쪽의 숙신과 동부여를 정벌하였습니다. 남으로는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황해로 나아가는 백제 수군의 요새인 관미성을 함락하였습니다.
광개토태왕의 명칭 ‘好太王’
또한 신라를 침입한 왜와 가야의 세력에 대해 신라 내물마립간의 요청으로 보병과 기병 5만명을 보내 물리쳤습니다. 이 때문에 가야연맹은 낙동강 동쪽 영토를 상실했으며, 그 중에서도 금관가야의 국력은 약화됩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신라 왕이 노객(奴客)을 자처하며 신하의 예를 올리면 태왕이 은덕을 베풀었다”고 적혀있을 정도입니다. 경주 노서동 신라고분인 일명 호우총에서는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釪十)’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 그릇이 발견되기도 했지요. 을묘년인 415년에 2년 전 세상을 떠난 광개토태왕에 대한 제사를 지내며 사용한 용기로 추정됩니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신라에서도 엄청난 것이었지요.
한편 광개토태왕은 무한질주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중앙 관직을 정비하며 국가의 틀을 안정시키고 불교를 장려하여 평양에 9개의 절을 짓는 등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변방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을 통해 그는 4세기 말 5세기 초에 거대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새로운 고구려라는 국가 브랜드를 창출해 낸 것입니다. 즉 고구려의 역사는 광개토태왕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정도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