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5)
(3)고조선은 살아 있다
(4)하늘과 인간 연결해주는 솟대신앙…
(6)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린 장수왕
(7)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美
(8)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3)고조선은 살아 있다
(4)하늘과 인간 연결해주는 솟대신앙…
(6)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린 장수왕
(7)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美
(8)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5세기 고구려의 유적인 수막새, 금동깃털모양 관 꾸미개, 쌍영총 말 탄 사람 벽화 (왼쪽부터)](https://img.hankyung.com/photo/201501/01.9553844.1.jpg)
역발상으로 위기 돌파한 광개토태왕
![[한국사 공부] 고구려,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다](https://img.hankyung.com/photo/201501/AA.9552022.1.jpg)
더 이상 중국의 변방이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패배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도록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고구려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북으로는 유목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와 거란 등의 끊임없는 침입을 막아내기 바빴고 남으로는 강력한 백제의 침공 또한 견뎌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죽임을 당한 후 광개토태왕의 큰아버지인 소수림왕은 충격에 빠진 고구려인들을 달래며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치하며 율령을 반포하는 등 안정 지향적인 통치에 절치부심했지만, 불안한 고구려를 완전히 안정시키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된 광개토태왕은 과감한 역발상으로 이런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꿔버립니다. 단지 왕조를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변방에서 벗어나 그 중심 국가로 거듭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발상을 바탕으로 그는 ‘최고의 수비는 곧 공격’이라는 말처럼 과감하게 동서남북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는 정복 활동을 동시다발적으로 펼치게 됩니다. 사실 그의 정복은 도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는 곧 성공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10개 성을 점령하였으며, 북으로는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00명을 사로잡습니다.
이런 폭발적인 질주를 하면서도 광개토태왕은 그저 큰 땅을 차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전략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영토를 확장해 갑니다. 중국 대륙과 연결할 수 있는 통로인 요동반도와 만주 및 연해주 일부, 한반도에서 수륙 모두를 통해 중국와 일본까지 연결할 수 있는 한강 북부 일대,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와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는 동해까지 마치 부채를 펼친 것처럼 요충지를 쉴 새 없이 장악해 갑니다. 곧 북으로는 중국의 북연을 물리치고 거란을 정복하였으며 북쪽의 숙신과 동부여를 정벌하였습니다. 남으로는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황해로 나아가는 백제 수군의 요새인 관미성을 함락하였습니다.
광개토태왕의 명칭 ‘好太王’
![5세기의 그릇, 호우명](https://img.hankyung.com/photo/201501/AA.9535864.1.jpg)
한편 광개토태왕은 무한질주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중앙 관직을 정비하며 국가의 틀을 안정시키고 불교를 장려하여 평양에 9개의 절을 짓는 등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변방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을 통해 그는 4세기 말 5세기 초에 거대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새로운 고구려라는 국가 브랜드를 창출해 낸 것입니다. 즉 고구려의 역사는 광개토태왕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정도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