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혁신기업의 산실 실리콘밸리를 가다 (5·끝) 열정이 있어야 세상 바꾼다
애런 레비 ‘박스’ CEO
애런 레비 ‘박스’ CEO
미국 실리콘밸리 로스앨토스에 있는 클라우드 서비스업체 ‘박스’ 본사엔 ‘초콜릿 팩토리’라는 다소 특이한 문패를 단 회의실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박스 창업자 에런 레비 최고경영자(CEO)는 “박스를 창업할 당시 초콜릿 공장을 하던 삼촌의 차고가 작업실이었다”며 “사업 초기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기 위해 회의실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스는 문서와 사진, 음악 등 다양한 파일을 서버에 저장해 관리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회사다. 개인회원은 2000만명이 넘고 기업 고객도 18만곳 이상이다. 포천 500대 기업 중 495개가 박스에 자료를 저장하고 있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05년 박스를 창업한 레비 CEO는 올해 갓 서른 한 살이다. 좁은 차고에서 시작해 지금은 성공한 벤처기업가가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초콜릿 팩토리’에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꿈틀댔던 스무 살 당시의 초심을 되새긴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

[왜 기업가정신인가] 15번의 창업 그리고 실패…스무살, 다시 도전 "세상을 바꾸려고"
레비 CEO는 대학 시절 파라마운트픽처스, 미라맥스 등에서 인턴으로 일한 경험이 있지만 애초부터 정식 직원으로 입사할 마음은 없었다. 그는 “대기업에서 상사의 지시에 따라 주어진 역할만 하는 건 재미없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박스를 창업하기 전 그가 세운 회사는 15개에 이른다. 그는 “중·고등학교 동창들과 검색엔진, 부동산 관련 웹사이트 등을 만들었지만 실패했다”며 “그 과정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엇인가를 실현 가능한 최신 기술을 활용해 내놓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고 전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박스다. 레비 CEO는 “데이터는 갈수록 많아지는데 컴퓨터에 이를 다 저장하는 건 한계가 있다”며 “이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편해질까 생각했다”고 창업 배경을 설명했다. 상상 속의 일을 가능한 한 빨리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이후 차고에 틀어박혀 여러 소프트웨어 기술을 합치고 많은 서버를 동원하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다. 며칠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심지어 3일간 한 번도 작업실 밖으로 나가지 않은 적도 있다.

역시 문제는 돈이었다. 레비 CEO가 접촉한 투자사는 25곳이 넘었지만 모두가 투자에 난색을 보였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투자자 목록에 있는 주소로 단체 이메일을 보냈다. “회사를 창업했는데 관심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이틀이 지나 답신 메일이 하나 왔다. 미국프로농구 댈러스 매버릭스의 구단주이자 억만장자인 마크 큐번이었다. 큐번은 그를 만나보지도 않고 선뜻 35만달러(약 3억7000만원)를 보내줬다. 입금 후 1주일이 지나서야 직접 얼굴을 마주한 큐번은 사업 아이템뿐 아니라 그의 배짱과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벤처 투자업계 ‘큰손’이 사업에 관심을 보이자 실리콘밸리 내 다른 벤처자금도 100만달러, 1000만달러씩 자본을 댔다.

경쟁사들 진입에 기업 시장으로 눈 돌려

투자에 숨통이 트여 사업이 자리를 잡아가려고 할 때쯤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같은 대기업이 경쟁자로 등장했다. 클라우드 저장 서비스가 혁신적인 사업 아이템으로 주목받자 정보기술(IT) 대기업들이 자체 클라우드 서비스 구축에 나서 공짜로 저장 공간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에 레비 CEO는 개인에서 기업으로 사업 범위를 넓히는 새로운 전략을 짰다. 박스는 2007년 재빨리 디즈니나 이베이, 델과 파나소닉 등 경쟁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글로벌 대기업 시장 선점에 나섰다. 보안성이 탁월한 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기업별 맞춤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굵직굵직한 기업과 잇달아 장기계약을 맺었다.

덕분에 박스의 성장세는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렸다. 2013년 매출은 전년 대비 150% 급증했다. 조만간 기업공개(IPO)도 준비 중이다. 시장에서는 박스의 기업가치를 20억달러(약 2조1400억원)로 추정하고 있다. 레비 CEO는 “수십년 앞을 내다보고 전략을 짠다”며 “미디어와 보건산업 등 다양한 분야와의 교류를 확대하고 관련 사업 간 융합 방법을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써도 부족할 정도로 바쁜 사업가지만 창업에 뜻이 있는 젊은이들이 만나달라고 요청하면 짬을 낸다고 한다. 레비 CEO는 “실패해도 빨리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자,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가진 당신이 바로 내일의 주인공이다”는 점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로스앨토스=윤정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