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사 여행] "물가불안이 경제 왜곡시켜"…美 대공황 분석 기틀 마련

(30) 공공선택론의 선구자 크누트 빅셀

19세기 후반 유럽은 자유무역, 사유재산권의 확립 등 친시장 개혁에 주력했다. 북유럽의 중심지 스웨덴도 이런 개혁의 물결 속에 있었다. 무역장벽을 허물고 토지개혁과 금융개혁 등으로 자유의 영역이 확대됐다. 교육제도도 기술 중심 교육으로 정비돼 갔다. 그런 개혁의 결과 스웨덴 경제는 날로 번창했다.

그럼에도 빈곤층, 알코올 중독, 범죄 등으로 시민들의 불안감도 작지 않았다. 산업혁명의 그늘진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경제학 발전에 탁월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스웨덴 출신의 크누트 빅셀(Knut Wicksell)이다. 일찍 부모를 잃었지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수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에 수학에 입문했지만 점차 흥미를 잃었다. 빈곤, 알코올 중독, 매춘, 인구과밀 등 사회경제 문제에 관심이 쏠렸다.

빅셀은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면서 그런 문제의 진단과 해법을 열정적으로 다뤘다. 맬서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그는 빈곤, 매춘 등은 인구 증가 때문이고 이를 줄이는 효과적인 수단은 낙태 허용과 산아제한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학적 맥락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비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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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셀은 그런 비난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외국에 머물면서 경제학을 독학했다. 수리적 논리를 이용해 기존 경제학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게 자신의 과제라고 여겼다. 그런 과제에 대한 그의 해법은 선구적이었다.

빅셀이 각별히 주목한 것은 인플레이션 문제였다. 물가불안은 경제 전반을 왜곡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물가안정은 경제정책의 첫 번째 목표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중요성의 인식에서 인플레이션 원인에 대한 문제를 다뤘다.

그 문제의 해법으로 시장이자율과 자연이자율의 구분은 빅셀의 획기적인 통찰로 인정받고 있다. 시장이자율은 은행이 개인이나 기업에 돈을 빌려 줄 때 이자율이다. 자연이자율은 투자목적을 위한 실물 자본의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는 이자율이다. 두 이자율이 동일하면 경제가 안정적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두 이자율은 오늘날 명목이자율과 실질이자율의 개념에 상응한다.

통화당국이 화폐 수량을 늘림으로써 시장이자율을 자연이자율 아래로 낮출 수 있다. 빅셀이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그런 시장이자율 하락이 시장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문제였다.

대출이자율이 하락하면 새로운 자본재 사업에 투자하기 위한 기업들의 자금수요가 활발해진다. 그런 투자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소비재 생산에 필요한 생산요소들을 유치해야 한다. 그 결과 소비재 생산은 줄어들어 소비재 값은 인상된다. 이는 강제저축이나 다름 없다는 게 빅셀의 설명이다.

통화 공급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면 기업들은 자신들이 투자한 사업을 완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생산요소의 값을 올려야 한다. 노동자와 자원 소유자들은 높은 화폐소득을 통해 소비재 가격을 높이 부른다. 이로써 가격은 누적적으로 인상된다는 게 빅셀의 주장이다. 저축을 초과하는 대부자금의 수요는 생산요소에 대한 수요 증가, 원료가격 증가, 요소소득 증가, 소비재 가격 상승 등 물가가 연쇄적으로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빅셀의 인플레 정책제안은 간단하다. 정부는 인위적으로 값싼 통화인플레를 피해 시장이자율을 항상 자연이자율과 동일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통화량이 증대하면 물가가 인상된다는 화폐수량설을 이자율에 대한 적응과정을 통해 견고하게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빅셀의 경제사상 중에서 백미(白眉)는 재정사상이다. 그가 재정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19세기 중반 이래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 등 주요국들의 정부 지출이 지속적으로 증대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정부 지출로부터 편익을 얻는 자와 조세부담자 사이의 불일치였다.

정의로운 조세제도는 정부지출로부터 얻는 편익에 따른 조세부담 배분이라는 게 빅셀의 주장이다. 정부 지출에 의한 편익을 얻는 자가 조세 부담자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스웨덴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는 그 같은 정의로운 조세제도가 확립돼 있지 못하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빅셀은 정부 지출의 재원을 간접세나 관세에 의존하는 조세제도가 정의롭지 못한 제도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소득이 적을수록 조세부담이 커지는 역진적 효과 때문이다. 빈곤자가 부자의 공공재화 수요를 위해 조세를 부담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빅셀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어떻게 그런 정의롭지 못한 조세제도가 형성되는가의 문제다. 정치제도의 발전은 조세제도의 개선을 위한 선결조건이라고 그는 답을 내린다. 나쁜 정치제도는 나쁜 조세 또는 경제제도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빅셀은 정치과정의 문제점을 인식해 정부재정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정치를 분석하는 공공선택론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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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관점으로 정치 분석…경기변동이론 개발 토대

빅셀 사상의 힘


빅셀의 사상이 영어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였다. ‘창조적 파괴’로 유명한 슘페터는 빅셀을 ‘북유럽 경제학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복지국가를 옹호하는 ‘시장 사회주의자’였던 빅셀의 사상은 경기의 불안정성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재돼 있다고 믿는 ‘스톡홀름학파’에도 이념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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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것은 빅셀의 화폐사상이 자유주의 거성, 미제스와 하이에크 등 오스트리아학파에 미친 영향이다. 그들은 빅셀이 말하는 가격의 누적적 과정을 기초로 해 경기변동이론을 개발, 1929년 세계 대공황을 불러온 영향을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미국의 중앙은행이 1920년대 초부터 지속적으로 통화량을 늘린 결과 가격 인상만이 아니라 생산과정과 투자가치를 왜곡시켜 필연적으로 경기변동, 즉 불황을 야기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시장이자율이 하락해 야기되는 활발한 투자활동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장이자율은 실질 저축을 반영하지 않은 왜곡된 이자율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자본시장에서 동시다발적인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흥미롭게도 경기침체는 그런 잘못된 투자를 수정해 정상적인 상황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게 오스트리아학파의 주장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불황을 극복하겠다는 야심에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그런 회복과정을 방해하고 더디게 만든다는 이유로 정부 개입을 반대한다. 1930년대 불황이 8년이나 오래 지속되고 실업이 20%나 넘을 정도로 불황이 깊었던 이유는 정부의 무모한 개입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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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래 학계에서 새로이 각광을 받고 있는 ‘헌법경제학’에 빅셀의 사상이 미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빅셀은 정치제도가 조세제도 개선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인식에서 의회제도, 선거제도, 표결원칙을 분석해 적합한 제도를 제안한다. 그런 제도를 통해서 정치실패를 극복해야 한다는 게 빅셀의 핵심사상이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뷰캐넌, 미국의 유명한 공공선택이론가 거든 털록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빅셀의 그런 접근법을 기초로 해 헌법과 같이 정치적 과정을 안내하고 조종하는 정치제도를 분석해 자유와 재산권을 보호하는데 적합한 대안을 제시했다.

민경국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