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말의 주인공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주변의 어른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입니다. 매일 저녁 9시 뉴스, 정치기사로 가득한 신문, 어른 둘만 모이면 시작되는 정치 이야기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건 인간의 본성인가보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저 유명한 명제에 대한 오해에 가깝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한 건 인간이란 정치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어떤 뜻이냐고요? 좋습니다.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정치학』이라는 책을 읽으며 인간이 왜 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는지 살펴보도록 하죠.
우선 ‘정치적 동물’이라는 용어부터 다시 따져보겠습니다. ‘정치적 동물’은 사실 그리 좋은 번역어가 아닙니다. 차라리 ‘폴리스적인 동물’이라고 옮기는 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그리스 본문의 뜻에 더 잘 맞습니다. 폴리스적인 동물?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군요.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에 살았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 지역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있었죠. 옆 동네에는 페르시아나 마케도니아와 같은 대제국도 있긴 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국가가 더 완전한 국가 형태라고 자부했습니다. 페르시아와 같은 제국은 한 명의 왕이 다수의 신민을 통치하는 반면, 도시국가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이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기 때문에 도시국가가 더 우월한 정치 형태라고 본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 지역에 퍼져있던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폴리스적인 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겠죠? 인간이 본성적으로 폴리스적인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이란 정치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학』을 한국어로 번역한 천병희 님도 ‘정치적 동물’이라는 흔한 번역을 따르지 않고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이라고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왜 정치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얘기한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존 때문입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꼭 필요합니다.
“맨 먼저 생겨난 것이 가정이다. (…)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이렇듯 가정인데, 그 구성원을 카른다스는 ‘식탁의 동료들’이라고 부르고, 크레테의 에피메니데스는 ‘식구’라고 부른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 이상을 충족하기 위해 여러 가정으로 구성된 최초의 공동체가 마을이다. 마을이 형성되는 가장 자연스런 형태는 한 가정에서 아들들과 손자들이 분가해 나가는 것이다. (…)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인데, 국가는 이미 완전한 자급자족이라는 최고 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이전 공동체들의 최종 목표이고, 어떤 사물의 본성은 그 사물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 밖에도 사물의 최종 원인과 최종 목표는 최선의 것이며, 자급자족은 최종 목표이자 최선의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옮김, 『정치학』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가정과 마을을 이루는 이유를 ‘날마나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필요’는 비로소 국가를 통해서 완전히 충족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국가라고 불릴 정도의 공동체가 되면 이제 완전한 자급자족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 국가보다 작은 규모의 공동체로는 (당연하게도 개인 혼자서는) 자급자족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의 힘을 충족하려면 반드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해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국가의 목적이 자급자족에 있다는 말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선 국가, 가령 페르시아와 같은 대제국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도 담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크기가 크지 않은 폴리스가 국가의 본질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인간이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어야만 하는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볼까요? 국가는 단지 (자급자족을 하기 위한) 필요의 산물만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를 통해 비로소 개인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는다면, 개인은 자급자족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극단적인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떤 사고가 아니라 본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없는 자는 인간 이하거나 인간 이상이다. 그런 자를 호메로스는 “친족도 없고 법률도 없고 가정도 없는 자”라고 비난한다. 본성이 그러한 자는 전쟁광이며, 장기판에서 혼자 앞서 나간 말처럼 독불장군이다. 이로써 인간이 벌이나 그 밖의 군서 동물보다 더 국가 공동체를 추구하는 동물임이 분명해졌다. 자연은 어떤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logos)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 언어는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유해한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밝히는 데 쓰인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차이점은 인간만이 선과 악, 옳고 그름 등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공유에서 가정과 국가가 생성되는 것이다.” (『정치학』중에서)
인용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언어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어’로 번역된 ‘로고스logos’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프로네시스phronsis’를 의미합니다. 프로네시스는 우리말로는 ‘실천적 지혜’로 옮길 수 있습니다. 많은 고대 사상가가 그런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의 본질을 이성 능력에서 찾았습니다. 특히 인간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선한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이성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천적 지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실천적 지혜야말로 (다른 동물은 갖지 못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실천적 지혜는 폴리스 안에서만 발현될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언어와 의사소통, 그리고 윤리적 실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즉, 인간은 폴리스 안에서만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고,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먹거리가 풍부한 정글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죠. 생존하는 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가 완전한 인간일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와 사회계약설은 개인의 욕망 충족이 공동체 성립의 유일한 이유인양 얘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다면, 성공의 기쁨을 나눌 가족이 없다면, 자신을 인정하고 축하해주는 공동체가 없다면 그리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니라면 우린 우리의 이성과 윤리적 능력을 전혀 발휘할 수도 없습니다. 탁월한 삶은 골방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모인 광장에서 가능한 것이죠. 그걸 알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김영수 S·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