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113> 디자이너의 아버지는 경제다
디자인은 제품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는 부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연구 결과에서 개별 소비자들 역시 물건을 구매할 때 디자인이 1, 2순위의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인이라는 점을 확인해 준 바 있다. 그야말로 디자인을 모르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류가 디자인에 영향을 받아 온 것은 태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석기시대 토기에도 자신의 토기를 예쁘게 꾸미기 위해 단순한 문향 등을 넣어 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 인류가 심미적인 요소를 원초적으로 중시해 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처럼 디자인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왔지만, 디자이너라는 직업과 업무가 등장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디자이너의 탄생과 발달에 경제원리가 커다란 역할을 해 왔다.

분업으로 탄생한 직업 디자이너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탄생시킨 경제 원리는 분업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제 수공업이 제품 생산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제품 생산 절차는 철저히 분업화되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한 사람이 제품의 설계부터 최종 조립까지의 모든 공정을 혼자 담당해 왔다. 이런 사람들을 흔히 장인이라고 하는데, 장인은 그래서 디자이너와 달리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을 함께 보유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들 장인이 특정 제품을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수행해야 할 일은 해당 물건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도안 작업 내지 설계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데 이는 디자인 작업에 해당한다. 따라서 장인의 업무에는 디자인적인 업무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공장에서는 작업 공정별로 특정 노동자가 배치되었고, 각자가 제품 생산에 있어 특정 공정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즉, 노동의 분업화가 전개된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제품을 어떠한 형태로 만들지 제품의 색깔은 무엇으로 할지에 대한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디자이너의 원형이 되었을 것이다.

노동의 분업화는 비숙련 노동자를 생산과정에 참여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전에는 오랜 숙련 정도를 보인 장인만이 제품 생산을 최종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분업화된 공장에서는 각 노동자들이 아주 작은 업무만을 담당하기 때문에 미숙련 노동자라 하더라도 작업에 투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디자인은 오히려 더욱 중요한 요소로 주목받게 되었다. 디자인을 담당하는 직원은 제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각각의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업무를 부과해야 하는지 그리고 조업 과정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디자이너는 가장 중요한 조업 담당자로 부상하게 된다.

대공황 디자인 중요성 부각

디자이너의 탄생이 분업 때문에 이루어졌다면, 디자이너의 중요성을 보여준 것은 대공황이었다. 대공황 이전에는 세이의 법칙(Say’s rule)이라고 해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믿어왔다. 이는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논거로써, 이들이 수요보다 공급을 중시한 이유는 물건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이에 참여한 경제 주체들은 소득을 얻게 될 것이고, 이러한 소득에 기반하여 수요가 창출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물건을 만들어 공급하는 과정에서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은 임금이라는 소득을 얻게 되고, 자본을 빌려준 사람은 이자라는 소득을 얻게 되고, 토지를 빌려준 사람은 임대료라는 소득을 얻게 된다. 이렇게 소득이 생긴 사람들이 결국 물건을 수요하기 때문에 공급만 원활히 되면 수요는 저절로 창출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대공황을 경험하기 이전에는 원활한 공급으로 인해 수요 부분에 커다란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공황 때는 상황이 달랐다.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졌음에도 수요가 창출되지 않은 것이다. 이때부터 케인즈를 비롯한 많은 경제학자들이 수요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수요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며, 구매력이 뒷받침된 수요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대공황을 계기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당시 부각된 주요한 경제 개념 중 하나가 이미 유사한 물건을 구매한 사람일지라도 이들에게 다시 구매를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대공황 이전에는 제품별 특성은 크지 않았다. 포드사에서 만든 T자형의 자동차만 떠올려보더라도 전부 동일한 검은 색상에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포드 자동차를 구매한 사람이라면, 그 자동차가 망가지지 않는 한 또다른 자동차를 구매할 필요가 없었다.

유행으로 신규수요 창출


하지만 극심한 불황을 경험하던 대공황 시절, 많은 생산자들은 자신의 물건을 구매해 줄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낙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어떻게 하면 기존 구매자들에게 다시 구매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고심하다, 디자인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대공황 이전에는 자신이 구매한 제품이 망가져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려워질 때가 아니면 새로운 물건을 구매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물건이라 봐야, 이미 자신이 기존에 사용한 물건과 동일한 형태와 색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경영자들은 기존의 제품이 다 마모되기를 기다리거나 망가지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하지만 어느 순간 신제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유용한 방법은 색상이나 형태를 바꾸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합하면서 커다란 성과를 보인 초창기 디자이너들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대공황 이후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 헨리 드레이퍼스(Henry Dreyfuss) 등의 스타 디자이너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디자이너들은 오늘날 디자인 회사와 같이 작게는 수십명 많게는 백 명 이상의 디자이너를 사내에 보유하고 다양한 제품들에 디자인적 요소를 가미해 주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변화는 제품이란 못쓰게 될 때까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유행이 지나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113> 디자이너의 아버지는 경제다
이후부터 여성들은 자신이 입은 옷이 다 헤지지 않았어도, 새로이 옷을 구매해야 했으며, 남성들도 자신이 타고 다니는 차가 망가지지 않았어도 새로 출시한 차량을 구매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의류 분야는 디자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산업 분야이다. 이는 우리가 옷을 사는 이유가 기존의 옷이 다 헤져서 못 입게 되어 새로운 옷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행에 부응하기 위해서 또한 신규 디자인이 맘에 들어 옷을 산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미국의 경우 의류시장은 영화 시장의 12배, 출판시장의 30배, 의료시장의 5배 이상에 해당하는 시장 규모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디자인이 신규 수요 창출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분야가 서로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공존하고 있지만, 특히 디자인만큼 경제학에 신세를 진 분야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박정호 KDI 전문연구원 aijen@kdi.re.kr



< 경제 용어 풀이 >

▨ 분업화

단독으로 행하는 일을 여러 부분으로 분할하여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한 가지 물건을 만들 때, 작업과정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효율성을 높이게 된다. 분업의 이런 효과는 비교우위를 생산에 도입했기 때문에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