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사 여행] "취약계층은 정부가 돌봐야"…美 '버핏세' 추진 근거돼

(14) '분배정의론' 개척자 존 롤스

분배정의론을 개척해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미국 사회철학자 겸 정치경제학자 존 롤스(John Rawls). 아버지가 유명 변호사이고 어머니는 여성유권자연맹 대표로 활약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롤스는 소득과 재산이 재주 능력 등 타고난 개인 특성과 출신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했다. ‘행운의 여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집단이 서민층이고 은총을 받은 계층이 상류층이라는 인식 아래 분배사상을 전개했다. 서민층의 애환을 대변하는 온정주의 철학자라고 불릴 만큼 그의 정의관은 ‘자연의 복권’에 당첨되지 못한 계층의 복지증진에 초점을 맞춘다.

[경제사상사 여행] "취약계층은 정부가 돌봐야"…美 '버핏세' 추진 근거돼
롤스가 그런 사상을 갖게 된 것은 어릴 때 겪은 뼈아픈 사연들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가 앓고 있던 병이 전염되어 어이없게도 어린 두 동생을 잃었다. 그가 말더듬이가 될 정도로 동생들의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풍요 속에서 사는 자기와 비교할 때 아주 대조적으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교육기회도 없고 삶의 장래도 어두운 친구들,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측면에서 차별받는 현실 등이 그에게는 운명의 장난처럼 보였다.

이런 경험 속에서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의구심이 성실하고 영민한 젊은 롤스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그 문제는 마침내 도덕·철학적 거대담론이 되어 그의 대학원 과정은 물론이요, 평생의 주제가 됐다.

롤스의 정의관 핵심은 소득과 재산의 분배를 자연에 맡기는 경제체제는 정의롭지 못하며 자연으로부터 차별당한 서민층에게 보상하는 경제체제가 정의사회라는 것이다. 그는 그런 사회를 위해 유명한 세 가지 정의의 원칙을 개발했다. 하나는 서민층에게도 똑같이 정치적 자유(언론신앙 등의 시민적 자유와 참정권과 같은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자유원칙이다. 두 번째는 서민층 우대정책을 통한 공정한 기회의 원칙이다. 그리고 서민층의 장래를 개선하는 조건에서 소득재산의 불평등을 허용한다는 차등원칙이 세 번째다.

롤스의 정의 원칙은 미국의 전통적인 자유사상과는 크게 차이난다. 전통 자유사상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의 존중, 법치주의와 제한된 정부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 자본주의를 신뢰하지 않았다. 시장사회는 분배를 ‘자연의 추첨’에 맡기기 때문에 심각한 불의로 점철됐다고 믿었다.

롤스는 정부가 취약계층에 대한 우대정책, 상속세, 교육 등을 통해 공정한 기회를 만들어주고 높은 과세를 통해 부의 집중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롤스의 정의사회는 결과적으로 거대 정부로 연결된다. 그의 정부 개입론은 그러나 당초 취지와 달리 사적 부문의 재산권과 경제자유를 침해하고 결국 서민층의 삶도 어렵게 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조세부담을 줄이고 규제를 푸는 게 서민층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주목을 끄는 것은 롤스의 자유의 원칙이다. 이를 통해 보호받는 기본권은 정치적 자유이고 이는 절대적이다. 사유재산제와 경제자유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들은 있으나 없으나 정의사회와는 상관없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그러나 롤스의 이런 생각은 사유재산이 없으면 가격이 없고 그래서 경제계산이 불가능하다는 미제스-하이에크의 유명한 인식을 망각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인권을 보호하는 지구상의 모든 민주주의는 자유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보편적 주장을 감안하면, 경제자유가 없거나 제한해도 정치적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는 롤스의 믿음은 논란 대상이다. 캐나다의 유명한 싱크탱크인 프레이저 연구소가 발표한 2012년도 세계경제자유보고서도 경제자유가 많은 나라일수록 정치적 자유도 크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우연에 의한 것이기에 타고난 재주나 능력은 개인소유가 아니라 집단적 자산이라는 롤스의 주장도 주목을 끈다.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재주, 박주영의 축구 재능은 우연에 기인한 것이니까 그들이 버는 돈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연의 결과는 공유해야 한다는 논리적 근거도 약하거니와 우연만으로 그들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도 오류라는 의견이 많다.

자연은 누구에게든 특정한 재주와 능력을 부여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어떤 능력을 주었는지, 어떻게 이용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신비롭게도 자연은 그것을 알아내고 발견하는 것을 개인 각자의 몫으로 돌렸다. 그래서 운 자체는 성공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운을 기회로 만드는 것, 이것이 성공의 열쇠이고 그런 발견이 자기 소유의 근거라는 것을 롤스는 인식하지 못한 듯하다. 또 개인소유가 인정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최대한 개발할 동기를 갖게 된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롤스의 사상은 많은 비판의 여지를 남기기는 했지만 정치철학, 윤리학, 심리학, 경제학 등 학제를 융합해 종래의 후생경제학이 다루지 않았던 신천지의 분배정의를 선구적으로 개척했다. 항상 겸손하고 모범적인 학자로서 서민층을 지키는 데 헌신했다는 의미로 그는 ‘하버드의 성인(聖人)’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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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유럽 복지확대에 영향

롤스 사상의 힘

[경제사상사 여행] "취약계층은 정부가 돌봐야"…美 '버핏세' 추진 근거돼
존 롤스의 사회정의는 구성원들이 평등함에도 자연은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재주나 능력 등을 준다는, 그래서 재분배를 통해 이 같은 자연의 은총을 사회에 돌려줘야 하고 반면에 자연으로부터 차별당한 서민층은 국가의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다. 이런 분배정의는 뒤처진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돼 있는, 그래서 집단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과 ‘사회적 기본권’이라는 명분으로 분배 혜택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하는 사회다.

롤스가 이런 비전을 제시한 시대적 배경은 성차별, 서민차별,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20세기 중반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도 된다는 의미에서 머릿수를 중시하는 공리주의로 미국 사회는 경제적 사회적 차별이 심각했다.

롤스는 분배정의에 합당하게 미국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고 또 그런 개혁을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를 개혁할 지적 능력의 한계 때문에 그런 낙관은 ‘치명적 자만’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자유와 제한된 정부를 기반으로 하는 ‘자생적 질서’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고 이것이 서민층을 보호하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하이에크의 인식론적 비판에 부딪친다. 롤스 사상은 공동체에 대한 연고관계를 무시하고 권리만을 중시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권리라는 명분을 댄다는 의미의 ‘권리의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는 공동체주의의 윤리적 비판에도 직면했다.

이런 비판에도 롤스의 분배사상이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부부는 서민층을 위해서는 정부 지원과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롤스의 팬이었다. 연간 100만달러 이상을 버는 가계라면 중산층보다 적은 세금을 내서는 안 된다는 워런 버핏의 조세준칙(일명 버핏세)도 국가는 강제적으로 재분배를 해도 된다는 롤스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경제사상사 여행] "취약계층은 정부가 돌봐야"…美 '버핏세' 추진 근거돼
오래 전부터 롤스의 사상을 잘 알고 있었던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역시 롤스의 팬이었다. 누구나 공정한 자기 몫을 받고 공정한 세금을 내서 교육과 기술 개발, 그리고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는 사회가 정의사회라는 그의 주장도 롤스의 사상에서 배운 내용이다.

롤스 사상이 미친 영향은 미국 사회만이 아니다. 1970년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이 복지를 확대할 때 유럽의 정치권이나 학계는 복지 확대의 철학적 근거를 롤스의 사상에서 찾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민경국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