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어려운 노인 분들을 위해 써주세요"
“같은 분이다. 작년에 1억1000만원을 넣고 가셨는데, 올해도 1억570만원을 몰래 자선냄비에 넣고 가셨다.”
지난 10일 구세군.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전날 자선냄비를 통해 모금된 성금을 집계하고 있었다. 서울 명동 입구에 설치된 자선냄비 모금액을 파악하는 순서가 돌아왔다.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하얀 봉투 안에 1억570만원짜리 우리은행 수표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구세군은 명동 우리은행 앞 자선냄비를 지켰던 사관학생을 찾았다. 현장 모금을 진행한 홍선옥 사관학생(29)은 흰 봉투를 보자 기부자를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60세 안팎의 나이에 깔끔한 밤색 재킷 차림을 한 남성분이었어요.” 짧은 대화도 나눴다고 했다. “꼭 어려운 노인분들을 위해 써주세요.” “감사합니다. 꼭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부자는 택시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했다.
구세군이 더욱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1년 전인 작년 12월4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자선냄비에 1억1000만원을 몰래 넣고 간 ‘얼굴없는 천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퍼진 것. 구세군은 즉시 확인에 들어갔다. 당시 모금을 진행한 문형기 사관학생(32)은 그 분은 올해와 비슷한 말을 남기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고 증언한다. 당시 구세군은 “익명의 후원자가 1억1000만원짜리 수표를 편지와 함께 흰 봉투에 넣어 기부했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구세군은 확인 결과 “후원 시기와 장소, 편지의 필체와 내용 등을 보면 올해 1억570만원권 수표 후원자와 작년 1억1000만원권 수표 후원자가 같은 분인 듯하다”고 밝혔다. 연령대와 차림새, 기부 액수도 엇비슷하고, 12월 초 명동의 자선냄비에 수표와 편지가 든 흰 봉투를 직접 넣고 간 것도 같다는 게 구세군의 설명이다.
수표 발행처도 두 번 다 우리은행인 점도 동일 인물임을 뒷받침했다. 작년 1억1000만원은 구세군이 자선냄비 거리 모금을 시작한 지 83년 만에 기록한 최고액 익명기부였다. 구세군의 추측이 맞다면 한 사람이 두 해에 걸쳐 2억원이 넘는 금액을 익명으로 기부한 셈이다.
구세군은 이 후원자의 편지를 공개했다. ‘평생에 부모님은 이웃에게 정도 많이 주시고 사랑도 주시고 많은 것을 노나(나눠) 주셨읍(습)니다. 그러나 호강 한번 못하시고 쓸쓸히 생을 마감하시고 고인이 되셨읍(습)니다. 부모님의 유지를 받들어 작은 씨았(앗) 하나를 구세군님들의 거룩하고 숭고한 숲속에 뛰(띄)워 보냅니다. 2012년 12월 신월동 주민이.’
지난해 편지에는 ‘저에(의) 적은 성의지만 거동이 불편하고 소외된 어르신들한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였(었)으면 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올해는 ‘꼭 어려운 노인분들을 위해 써달라’는 말만 다를 뿐 기부 취지는 같았다. 추운 날씨에 거액을 서슴없이 기부하고 사라진 그는 누구일까? 굳이 밝히지 않는 것이 ‘얼굴없는 천사’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