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부 실패론' 주창한 제임스 뷰캐넌
케인스를 비롯한 주류경제학과 사회주의 등 모든 간섭주의 경제학은 시장이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탐욕적이라고 묘사한다. 반면 정치는 공공심에서 국민 행복(사회적 후생함수)을 위해 행동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정부 역할을 더욱 더 강화해야 인류가 ‘시장 실패’를 극복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난한 미국 남부 출신이라는 이유로 법적 차별을 겪어야 했고 기득권자의 독단적인 지배에 대한 혐오감을 안고 성장한 제임스 뷰캐넌(James M. Buchanan)은 인간 행동의 그 같은 비대칭적 시각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카고대학의 프랭크 나이트(순수이론 경제학의 수립자이자 자유시장경제를 주창한 시카고학파 창시자 중 한 명)로부터 학문적 자신감을 키운 그는 ‘시장 실패’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정치 실패’라고 주장하며 간섭주의 경제학을 흔들어댔다.
간섭주의 경제학이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또렷이 보여주는 것은 잘 알려진 로마황제의 우화다. 내용은 이렇다. 두 가수는 서로 자기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다투다가 황제의 심판을 받기로 했다. 첫 번째 가수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그가 노래를 끝내자마자 황제는 두 번째 가수의 노래를 들어보지도 않고 두 번째 가수에게 상을 줬다. 첫 번째 가수가 황제의 음악적 눈높이에 미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두 번째 가수는 음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 우화에서 첫 번째 가수는 자유로운 시장 과정이고 두 번째 가수는 민주주의나 관료와 같은 정치 과정이다. 뷰캐넌이 이 우화를 통해 간섭주의 경제학자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정치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더 이상 황제의 우(愚)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뷰캐넌은 예산을 짜고 나라 돈을 쓰고 법을 만드는 정부 관료는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소득과 권력, 명예 등과 같은 이기심에 근거해 행동한다는 점에서 시장참여자와 결코 다를 바가 없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믿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간섭주의 경제학은 ‘얼빠진 학문’이라고 질타한다.
뷰캐넌은 인간이 현실적인 이기심을 밑바닥에 깔고 행동한다는 점을 전제로, 민주주의 관료 다수결 재정 정당제도 입법 등을 분석 대상으로 한 ‘공공선택론’의 혁명적인 패러다임을 개발, 발전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재정적자론이다.
본디 인간이란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그래서 국민은 정부가 지출을 늘리거나 세금을 줄이면 싱글벙글 웃고, 그렇지 않으면 투정을 부린다. 유권자의 인기와 선택이 핵심 키워드인 정치에서 적자예산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흥미롭게도 뷰캐넌은 케인스와는 정반대로 부채의 부담은 전적으로 후세대가 짊어진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래 세대는 태어나지 않았으니 적자예산에 대해 반대투표도 할 수 없다.
정부는 미래의 인플레이션을 무릅쓰고라도 당장 유권자들의 인기를 끌 수 있다면 돈을 기꺼이 푼다. 입법부는 보편적인 법보다는 목소리가 크거나 권력이 큰 집단에 유리한 특혜적 입법과 차별적 제도를 생산한다. 흥미로운 것은 정치가들은 그런 정책들이 나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정치가들의 그런 행동을 위선이라고 비난한다.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불신도 크다. 정치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뷰캐넌은 정치인들의 사람 됨됨이를 보지 말고 나쁜 행동을 유도하는 정치제도를 직시하라고 충고한다. 정치인이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성품이 나빠서가 아니라 정치제도가 잘못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 미국 독일 등 주요 국가들이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이유도 민주정치 제도의 문제점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적자 속의 민주주의’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그렇게 생겨났다.
뷰캐넌이 주목한 것은 이 같은 정치 실패(민주주의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과 해법이다. 그는 헌법을 인식 대상으로 하는 ‘헌법경제학’을 창시해 발전시켰다. 그 핵심 논리는 헌법이 잘못돼 있으면 정치체제도 왜곡돼 나쁜 법이 제정된다는 것이다. 뷰캐넌이 개탄하는 것은 현대사회 모든 국가의 헌법에는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칙의 정치’ 대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예산을 운영하고 돈도 풀고 법도 마구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008년 미국발(發) 금융위기도 정부의 방만한 통화정책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헌법적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야기됐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헌법 실패’이지 자본주의 탓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오늘날 겪고 있는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과 실망도, 1987년 제6공화국 출범을 앞두고 만들어진 ‘87년 체제’(헌법 제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 등 민중민주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9차 개헌헌법 체제)의 거대한 실패가 아닐 수 없다.
기존의 헌법을 바꾸지 않는 한,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뷰캐넌은 현대사회에 헌법혁명을 촉구했다. 이 혁명이 없으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도래한다고 경고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그가 찾는 것은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억제해 자유와 번영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의 헌법’이다. 이것이 그의 학문적 여정의 최고 절정이요 인류 번영을 위한 공헌이다.
민경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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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親시장헌법 개정에 영향
뷰캐넌 사상의 힘
뷰캐넌의 사상은 시장 실패를 이유로 정부의 시장개입이 왕성하던 20세기 중반 이후의 산물이다. 케인스와 주류경제학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정부의 개입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회는 법이라고 볼 수도 없는 법을 마구 만들어냈다. 세금을 걷어서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에게 나눠줬다. 재정적자는 늘어만 갔다. 그 결과 개인의 자유는 유린됐고 기업 투자는 위축돼 실업과 경제침체가 만연했다.
뷰캐넌은 이 같은 상황을 ‘헌법적 혼란(constitutional chaos)으로 인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규정했다. 그의 헌법사상은 20세기 중반 이래 서구사회에 만연했던 그 같은 상황을 극복하고 자유와 번영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제도와 헌법을 찾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런 공로로 그는 1986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뷰캐넌은 쉽게 잊혀지는 수상자가 아니라 위대한 수상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새뮤얼슨 등과 달리, 문제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경제와 정치를 보는 근본적인 인식체계를 새로이 세우려는 ‘시스템 빌더’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류경제학자들은 무명의 시골대학 출신인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을 보고 나도 수상 자격이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들은 뷰캐넌의 공공선택론과 헌법경제학조차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공공선택 학파를 형성해 반대론에 대응했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입지전적인 이력을 만들어간 뷰캐넌은 복잡한 계량과 수리를 동원하는 주류경제학의 접근 방식은 재정확대나 적자 그리고 규제 증가만을 야기할 뿐 아무런 쓸모없는 지적 유희(遊戱)라고 맞섰다. 주류경제학은 수리를 통해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과세하는 것이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가져다주고 소득 분배의 형평성을 보장하느냐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