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전기를 돌려서라도 돈 찍어내겠다"
요즘 일본 정계와 재계를 뒤흔들고 있는 정치인은 단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자민당 총재다. 일본 총선을 앞둔 시점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난 17일 한 강연회에서 난데없이 내뱉은 한마디 때문이다. “일본은행의 윤전기를 쌩쌩 돌려 돈을 찍어내겠습니다.”
돈을 무제한으로 찍어내겠다는 공언. 역대 일본 정치인 중 이런 ‘무식한’ 말을 한 사람은 없다. 점잖게 ‘양적완화(quantititive easing·중앙은행을 통한 통화 공급 확대)’라고 해도 충분했는데 윤전기 운운했으니 파장은 불가피했다.
아베 총재 발언 이후 일본 엔(円)화 가치가 약세를 보이고 경기부양에 대한 기대심리를 타고 일본 주식시장은 뛰었다. 이웃 나라인 한국의 원화는 엔화 약세 때문에 가치가 가파르게 올랐다. 해외 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으로서는 악재다. 원화 가치 상승은 곧 수출 가격 경쟁력 하락을 뜻한다. 일본은 반대다. ‘엔화 약세=일본 수출 호전’이다.
아베 총재가 이렇게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돈을 풀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조장해 경기를 살리겠다는 의도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디플레이션(물가의 지속적인 하락) 탈출이다. 수출에 도움을 주겠다는 뜻도 된다. 물론 이번 총선을 통해 집권하면 이렇게 하겠다는 공약이다. 아베의 공약에는 경기 활성화를 위해 200조엔을 들여 토목공사를 하고,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건설국채를 무제한 매입해 시중에 실탄(통화)을 공급하는 것도 들어 있다. 집권하면 일본은행 총재도 이런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 사람을 임명하겠다는 입장이다.
아베 총재의 이런 올인 정책에 대해 반대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우선 두 손을 들어 환영할 것 같은 재계가 우려를 나타냈다. 기업단체인 경제동우회는 “무제한의 금융완화는 시장 불신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가 부채가 200%가 넘는 일본이 토목공사를 위해 200조엔을 더 풀 경우 국가 부채 증가로 유럽식 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아사히신문은 “윤전기를 돌려 화폐를 찍어내겠다”는 발언에 대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가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일본은행이 엄청나게 돈을 풀어 물가가 90배나 상승한 적이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중앙은행의 국채 직접 매입이 금지돼 있는 것도 모르나”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민당과 대척점에 있는 민주당도 발끈하고 나섰다. “개발도상국 군사독재 정권에서도 있을 수 없는 정책” “아베 총재의 자질이 의심된다”는 등의 비판을 쏟아냈다. 총선을 의식한 포퓰리즘적 공약의 성격이 강한 아베의 경제정책이 선거에서 약이 될지, 독이 될지 관심거리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