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파나소닉ㆍ소니ㆍ샤프 적자 '수렁'…무너지는 日 '전자왕국'
지난 11월1일 일본 도쿄. 파나소닉의 최고경영자(CEO)인 쓰가 가즈히로 사장(56)은 “유감스럽게도 디지털 가전에서 패배자가 됐습니다”라며 주주들 앞에 고개를 떨궜다. 그는 올 회계연도(2012년 4월~2013년 3월)에도 지난해와 비슷한 7650억엔(약 10조원)의 손실을 낼 것이란 예상을 밝힌 뒤 “파나소닉은 정상적 상태가 아니다. 투자 판단이나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 생각한 대로 되지 않으면서 손실이 확대됐다”고 반성했다.

#신용등급 '투자부적격'


파나소닉 쇼크는 일본 전자업체의 현주소를 대변하는 사례다.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소니와 파나소닉, 샤프 등은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그러나 일본 전자왕국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몰락하고 있다.

샤프는 올 회계연도에 4500억엔(약 6100억원)의 적자가 예상돼 파산 위기에 몰렸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샤프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투자부적격(정크) 등급인 ‘B-’로 6계단 떨어뜨렸다. 7분기 연속 적자를 내온 소니는 올해 적자를 면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지만, 예전과 같은 존재감을 되찾기는 어려운 상태다.

일본 전자왕국의 몰락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기술 맹신에 비롯된 자만심’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혁신제품을 개발해 시장을 선도하는 것은 일본 전자업체의 전매특허였다. 소니의 워커맨뿐 아니라 반도체 D램, 리튬이온전지, LCD(액정표시장치) 등은 모두 일본에서 발명됐다. 세계 1위의 지위가 영원할 것이라 믿게 됐다. 자만심에 빠지다보니 세계 시장의 트렌드를 읽지 못했다. 1990년대 말부터 급격히 진행된 디지털화의 물결 속에서 삼성전자, LG전자 등은 평판 TV를 앞세워 세계 시장을 공략했지만 20여년간 세계 TV 1위를 지켰던 소니는 브라운관 TV ‘트리니트론’을 주력으로 판매했다. 결국 2006년 삼성전자에 1위를 빼앗겼다.

파나소닉은 향후 주력 TV가 PDP(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가 될 것으로 판단, 막대한 투자를 해 2009년 세계 최대 규모의 PDP 공장을 완공했다. 하지만 그 사이 LCD가 PDP를 대체하면서 정작 완공과 함께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에 반해 삼성, LG전자는 LCD와 PDP 사업을 함께 하다가 PDP가 밀리자 과감히 LCD로 방향을 전환했다.

#갈라파고스 증후군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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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도 마찬가지다. 지난 7월 뉴욕타임스는 일본의 휴대폰 산업에 대해 ‘갈라파고스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묘사했다. 갈라파고스 제도가 육지에서 1000㎞가량 떨어져 있어 독특한 생태계가 형성된 것과 같은 상황이라는 것. 일본업계와 정부는 세계가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등 새로운 통신기술을 채택할 때 세계 표준을 무시하고 독자 통신 기술과 내수형 제품을 고집했다. 이렇다보니 애플 삼성전자 LG전자 HTC(대만) 등이 세계 시장을 차지하고 있을 뿐 일본 업체의 존재감은 사라졌다.

일본 전자업계가 세계 시장을 읽지 못한 데는 내수시장 의존도가 컸다는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일본 가전산업의 현실은 2009년 미국 자동차산업의 몰락 상황과 닮았다고 지적했다. 아서 알렉산더 미 조지타운대 교수는 “일본 가전업계가 내수시장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혁신을 게을리 하고, 새로운 시장과 경쟁업체에 대응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소니와 파나소닉, 샤프의 매출 중 내수 비중은 각각 32%와 48%, 53%에 달한다. 반면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경우 내수 비중이 10%대에 그친다.

여기에 일본 내수 시장은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 2008년 1억2780만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일본 인구는 2050년 1억100만명으로 쪼그라들 전망이다.

지배구조 문제도 영향을 줬다. ‘경영의 신(神)’으로 불린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1917년 세운 파나소닉의 위기가 이를 대변한다. 2차 대전 종전과 1990년대 일본 버블 붕괴 등으로 금융사들이 주요 기업의 대주주가 되면서 강력한 오너십과 장기 비전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파나소닉은 최대주주가 일본마스타트러스트신탁은행(5.42%)이며 일본생명보험상호회사 등 10개 금융회사가 1~5%씩 나눠갖고 있다. 이들 은행권이 가진 지분이 25%가량으로 이들이 하나의 사안을 결정하려면 수개월이 걸린다는 게 일본 내부의 평가다. 이렇다보니 미래를 위한 장기투자, 구조조정 등 책임져야 할 일은 누구도 하려 들지 않는다. 소니 샤프도 마찬가지다.

#삼성 LG의 역전승

반면 삼성전자 등은 강력한 오너십을 바탕으로 5~10년 뒤를 내다보고 선제적으로 투자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또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거치며 구조조정을 진행해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엔고도 일본 기업에 불리한 현상이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지난 5년간 50%나 급등했다. 일본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말이다. 일본 전자업체들은 품질 향상, 기술 유출 방지 등을 위해 해외 대신 일본 내 생산 비율을 높여 놓아, 비용 절감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김현석 한국경제신문 기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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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산업은 아직도 '난공불락'

삼성 LG 등 한국 기업들이 전자 제품에선 일본을 압도하기 시작했지만, 부품 소재 분야는 여전히 일본 기업의 세상이다. 일본이 차근차근 기초 체력을 키운 반면 한국 업체들은 단기간 내 돈을 벌 수 있는 완제품 분야에만 치중한 탓이다. 무라타 TDK 교세라 등으로 대변되는 일본 부품기업들은 수만여개에 달하며 소니 파나소닉 등 완제품 업체들이 위기를 겪는 와중에서도 실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전 세계 전자업체들이 부품을 일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삼성 LG 등이 쓰는 상당수의 부품과 소재가 일본산이다보니 대일 무역적자는 매년 200억달러가 넘고 수입의존도는 20%를 웃돈다.

[Focus] 파나소닉ㆍ소니ㆍ샤프 적자 '수렁'…무너지는 日 '전자왕국'
유정근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가 완제품 분야에선 일본을 따라잡았지만 부품·소재 분야에선 갈 길이 멀다”며 “부품·소재 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정책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도 부품소재 개발에 집중해 경쟁력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소재 부품 분야 수출액이 2001년 621억달러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2553억달러로 증가했다. 부품소재 시장 점유율도 5%로 처음 세계 5위 안에 들었다.

대일 수입 비중도 개선되고 있다. 국내 업체들의 소재·부품 일본 의존도는 2010년 25.2%에서 작년 23.6%로 떨어졌고, 지난 3분기에는 22.9%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2002년 53.4%였던 광전지 부문 대일 의존율은 지난해 8.7%로 감소했고 같은 기간 LCD(액정표시장치) 의존율도 90.7%에서 17.7%로 줄었다.

소재·부품 분야의 대일 무역적자 규모도 6분기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3분기의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작년 동기 대비 6.1% 감소한 161억달러였다.

정인설 한국경제신문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