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해방 이후 한국경제 소득불평등 개선한 인플레이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경제시스템을 구축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으며 극빈국에서 세계 10위권의 무역 규모를 자랑하는 국가로 거듭난 것이다.

우리 경제가 양적인 측면에서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양극화가 우리 경제의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로 부각되고 있긴 하지만 최근까지 비교적 균등한 소득분포 속에서 달성한 경제 성장이라는 점에서 그 질적인 부분에서도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의 눈부신 성장은 뒤로 하더라도 이러한 분배 정의는 어떻게 달성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 당시의 경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 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산업자본이 형성될 수 없었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회사령을 꼽을 수 있다. 회사령이란 이미 설립된 회사에 대하여 해산을 명령할 수 있고, 회사 신규 설립에는 총독부 허가를 얻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는 한국에서의 산업자본 내지 민족 자본이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고, 한국을 일본 산업의 원료 공급원으로 확보하려는 의도 하에 만들어진 제도였다. 물론 1920년 4월 회사령이 철폐되어 법률상 우리 민족도 기업 설립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 축척의 기회마저 빼앗겼기 때문에 회사령 철폐 당시에는 굳이 회사령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1921년 민족회사는 123개로 전체 회사 중 15.5%를 차지하였으나 1929년에는 회사 수가 362개로 19.3%로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자본금 면에서는 1921년 5743만원으로 4.3%를 차지하였으나, 1929년에는 4251만원으로 전체의 1.3% 수준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분배 정의 실현에 기여


이런 경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해방 이후 남한 정부는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산업자본을 형성하고, 많은 소작농들에게 농지를 분양해 농가 자립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9년 농지개혁법을 공포하였다. 이때 남한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북한과 달리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방식을 택했다. 즉, 지주들이 갖고 있는 토지를 정부가 유상으로 인수한 후 이를 다시 유상으로 많은 소작농에게 배분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일견 소득 불평등도를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지주들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했다면 이는 공짜로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분배 상태를 개선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와는 달리 소작농에게 돈을 받고 토지를 분배해주는 유상 배분은 그 돈은 지주에게 돌려주기 때문에 분배 상황을 개선하는 데는 크게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인플레이션이란 물가 수준이 지속적으로 오르는 현상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될 경우 경제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예상치 못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 경제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예상치 못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효과로 가장 먼저 투기 분위기가 형성된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아껴 저축하기보다는 토지나 기존에 만들어진 건물 구입 등의 비생산적인 투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는 사회 전반적인 근로의욕 저하나 생산을 위한 투자 활동의 위축을 초래하여 결국 국민 경제의 건전한 성장을 저해하게 된다.

지주계급 몰락의 원인

다음으로 인플레이션은 일종의 조세 역할을 할 수 있다. 정부가 통화량을 늘려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경우, 물가 상승을 불러일으켜 정부부채의 부담을 감소시키게 된다. 하지만 국민의 경우에는 화폐가치가 이전보다 하락한다. 다시 말해 정부 재산은 늘고, 국민 재산은 줄어들기 때문에 이는 마치 모든 사람에게 조세를 부과한 것과 같은 결과를 보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예상하지 못한 인플레이션은 빈부 격차를 심화시킬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땅이나 건물, 재고 상품과 같은 실물의 가치는 물가와 함께 상승하는 경향이 있지만 화폐 가치는 하락한다. 주택이나 건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서민들이나 봉급 생활자들은 화폐 가치 하락으로 실질 소득이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빈부 격차가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다시 해방 이후 우리 경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해방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우리 경제는 가장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된다. 1945년 9~12월에는 물가가 무려 112.9%나 뛰었고, 1947년에는 전년 말 대비 128.1%나 상승하였고, 1949년에는 전년 말 대비 무려 486.4% 상승하였다.

남한의 농지개혁법은 바로 이런 인플레이션 상황하에서 진행된 것이다. 남한 정부는 5년 연부보상(年賦補償)을 조건으로 소유자로부터 유상으로 토지를 취득하여 이를 소작농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지주의 재산 형태는 토지라는 실물자산에서 채권 내지 현금이라는 현물자산으로 재산의 형태가 바뀌게 된다. 반면, 소작농은 토지라는 실물자산을 취득하게 된다. 지주는 현물, 소작농은 실물 형태로 재산을 보유하게 된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손해는 고스란히 지주의 몫이 되었다. 소작농이 갖고 있는 토지의 가치는 상승하지만, 토지를 반납하고 취득한 지주들의 채권이나 현금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전체 농지의 92%가 자작농에게 돌아갔고, 수천년간 이어온 지주계급은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해체되었다.

인플레이션이 행운?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해방 이후 한국경제 소득불평등 개선한 인플레이션
흔히 인플레이션은 개별 경제주체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주는 요인으로 분류된다. 오쿤이 최초로 고안한 경제고통지수 역시 특정 시점의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의 합으로 계산된다는 점에서 인플레이션이 경제에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유발하는 요인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인플레이션이 우리 경제에서는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데 일부 기여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한 많은 나라가 아직도 비대칭적인 농업구조로 인해 고심하고 있고, 대표적으로 필리핀 역시 농지개혁과 근대화·산업화에 실패해 아직도 15대 지주 가문이 국부(國富)의 50%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 때, 해방 이후 우리가 직면했던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호 <KDI 전문연구원 aijen@kdi.re.kr >


경제 용어 풀이

▨ 경제고통지수

경제고통지수는 특정 시점의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을 합한 수치로 국민이 느끼는 경제적 고통 정도를 쉽게 가늠할 수 있도록 한 지표이다. 오쿤이 최초로 고안한 이 지수는 물가와 실업률이 상승할수록 높아져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 고통도 그만큼 커짐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