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 돈 학벌없는 나는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
영화감독 김기덕(52). 그가 일을 냈다. 지난 9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제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작품 ‘피에타’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베니스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프랑스 칸, 독일 베를린영화제)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김 감독은 아주 늦은 나이에 영화에 입문했다. 1992년 32세 때 프랑스에서 ‘양들의 침묵’과 ‘퐁네프의 연인들’을 본 뒤 영화에 매료됐다.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에 갔다가 옆길로 샜다. “그것이 제가 접한 생애 첫 영화 경험이었다.” 그의 첫사랑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그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중학교 졸업과 구로공단, 청계천 공장을 전전했던 그에게 시나리오는 그리 쉽게 ‘첫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4년 뒤인 1996년 그는 영화 ‘악어’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한국 영화의 본산 충무로는 그를 영화인으로 봐주지 않았다. 학벌 인맥 돈이 없던 그는 ‘3무(無)감독’으로 한국 영화계의 아웃사이더를 자청했다.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이라는 그의 자평은 삶과 환경이 빚어낸 자학이었다.
감독 데뷔 후 그는 잇따라 화제를 뿌렸다. 2000년 장편 ‘실제상황’을 저예산으로 하루 만에 끝냈다. 예술영화만 고집하는 그에게 돈을 대줄 사람도 없었고 아웃사이더에게 관심을 쏟아줄 만큼 온정주의적이지 않은 척박한 주변 환경이 그를 강하게 한 것일까.
그는 2004년 드디어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이 한 해에 그는 ‘사마리아’로 베를린, ‘빈집’으로 베니스에서 감독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한국에서 이름만 겨우 알려져 있던 감독에서 국제적 스타감독으로 ‘인사이더’가 됐다.
4년 뒤인 2008년 김기덕은 돌연 칩거에 들어갔다. ‘영화는 영화다’를 함께 만들던 제자 감독이 대형투자 배급사와 손잡고 자신을 떠나갔고, 영화 ‘비몽’에서 배우 이나영이 목을 매 자살하는 장면을 찍다 죽을 뻔한 사건이 터지자 사라졌다. 그의 모난 성격은 2011년 제64회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아리랑’으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은 뒤에도 나타났다. 그는 “영화제에서 상을 탔더니 훈장도 줬다. 영화를 보고서나 주는 건지 모르겠다”고 훈장을 수여한 정부를 무안하게 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야인(野人)이다. 1960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그는 넉넉지 않은 형편으로 중학교의 하나인 농업전수학교를 끝으로 학업을 접었다. 그는 한때 성직자가 되고자 했다. 피에타, 사마리아, 아멘 등 그의 작업이 종교적인 이유도 성직자의 꿈이 녹아든 결과다.
자본주의적 상업영화를 체질적으로 싫어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최근 또 하나의 괴상한(?) 행보를 했다. 상업주의의 극치인 TV예능프로그램 ‘강심장’에 전격 출연한 것. 그가 변한 것일까? 하지만 그는 베니스영화제 시상식에서 낡은 신발을 구겨신고 무대에 등장하는 파격을 일으켰다. 그가 ‘영화는 영화다’라고 했듯 ‘김기덕은 김기덕’이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김 감독은 아주 늦은 나이에 영화에 입문했다. 1992년 32세 때 프랑스에서 ‘양들의 침묵’과 ‘퐁네프의 연인들’을 본 뒤 영화에 매료됐다.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에 갔다가 옆길로 샜다. “그것이 제가 접한 생애 첫 영화 경험이었다.” 그의 첫사랑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그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중학교 졸업과 구로공단, 청계천 공장을 전전했던 그에게 시나리오는 그리 쉽게 ‘첫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4년 뒤인 1996년 그는 영화 ‘악어’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한국 영화의 본산 충무로는 그를 영화인으로 봐주지 않았다. 학벌 인맥 돈이 없던 그는 ‘3무(無)감독’으로 한국 영화계의 아웃사이더를 자청했다.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이라는 그의 자평은 삶과 환경이 빚어낸 자학이었다.
감독 데뷔 후 그는 잇따라 화제를 뿌렸다. 2000년 장편 ‘실제상황’을 저예산으로 하루 만에 끝냈다. 예술영화만 고집하는 그에게 돈을 대줄 사람도 없었고 아웃사이더에게 관심을 쏟아줄 만큼 온정주의적이지 않은 척박한 주변 환경이 그를 강하게 한 것일까.
그는 2004년 드디어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이 한 해에 그는 ‘사마리아’로 베를린, ‘빈집’으로 베니스에서 감독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한국에서 이름만 겨우 알려져 있던 감독에서 국제적 스타감독으로 ‘인사이더’가 됐다.
4년 뒤인 2008년 김기덕은 돌연 칩거에 들어갔다. ‘영화는 영화다’를 함께 만들던 제자 감독이 대형투자 배급사와 손잡고 자신을 떠나갔고, 영화 ‘비몽’에서 배우 이나영이 목을 매 자살하는 장면을 찍다 죽을 뻔한 사건이 터지자 사라졌다. 그의 모난 성격은 2011년 제64회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아리랑’으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은 뒤에도 나타났다. 그는 “영화제에서 상을 탔더니 훈장도 줬다. 영화를 보고서나 주는 건지 모르겠다”고 훈장을 수여한 정부를 무안하게 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야인(野人)이다. 1960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그는 넉넉지 않은 형편으로 중학교의 하나인 농업전수학교를 끝으로 학업을 접었다. 그는 한때 성직자가 되고자 했다. 피에타, 사마리아, 아멘 등 그의 작업이 종교적인 이유도 성직자의 꿈이 녹아든 결과다.
자본주의적 상업영화를 체질적으로 싫어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최근 또 하나의 괴상한(?) 행보를 했다. 상업주의의 극치인 TV예능프로그램 ‘강심장’에 전격 출연한 것. 그가 변한 것일까? 하지만 그는 베니스영화제 시상식에서 낡은 신발을 구겨신고 무대에 등장하는 파격을 일으켰다. 그가 ‘영화는 영화다’라고 했듯 ‘김기덕은 김기덕’이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