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라이벌] 영혼 울린 '흑인 음악'의 대부…그들의 노래는 지금도 흐른다

마빈 게이 vs 스티비 원더


고통받는 영혼을 달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솔(soul)은 흑인음악으로 널리 알려졌다. 미국 대중음악인 리듬앤드블루스가 연인의 사랑을 중시했다면 솔은 미국 사회의 비리와 흑인의 투쟁정신 등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회 참여 성격이 짙다. 솔 음악이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의 대표적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떠오른 데는 두 사람의 역할이 컸다. ‘솔 음악의 대부’로 불리는 마빈 게이(Marvin Gaye)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다. 이들은 미국 대도시 흑인빈민가의 실상을 노래에 담아 ‘대중음악의 사회성’이라는 화두를 이끌어냈다.

●고통이 만들어낸 영혼의 목소리


마빈 게이는 스티비 원더보다 나이가 11살 더 많다. 1939년 워싱턴에서 태어난 마빈 게이는 어린 시절 가난과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작은 교회의 목사를 잠시 지냈을 뿐 일생을 실업자로 보낸 그의 아버지는 매질을 일삼았다. 고통을 잊게 해준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공군을 제대한 뒤 고향에서 로큰롤 가수였던 보 디들리를 만나 음악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호소력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3옥타브를 넘나드는 리드미컬한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다.

마빈 게이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모타운의 창업자 베리 고디 주니어였다. 모타운은 미국 디트로이트의 음반제작사로 흑인이 소유한 최초의 레코드 레이블이었다. 디트로이트에서 밴드 공연을 하던 마빈 게이의 노래에 감명을 받은 베리 고디는 1961년 그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모타운에서 게이의 솔로 데뷔 앨범 ‘The Soulful Moods of Marvin Gaye’가 나왔다. 하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한동안 계속됐다.

● 어린 음악천재 스티비 원더

1950년 미시간주 새기노에서 태어난 스티비 원더는 조산아였다.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병원의 실수로 산소가 너무 많이 공급돼 눈 망막을 다쳤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음악은 친구였다. 10살이 되기 전에 피아노 하모니카 드럼 베이스기타 등 대부분 악기를 익혔다. 성가대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스티비 원더 역시 베리 고디와 인연을 맺었다. 1962년 전속 계약을 맺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12세였다. 이듬해인 1963년 8월 스티비 원더가 부른 ‘Fingertips Part.2’는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때 세운 최연소 1위(13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이후 히트곡을 줄줄이 낸다. 1965년부터 6년 동안 ‘Uptight’(1966) ‘I Was Made to Love Her’(1967) ‘For Once in My Life’(1968) ‘My Cherie Amour’(1969) ‘Yester-me, Yester-you, Yesterday’(1969) ‘Signed, Sealed, Delivered’(1970) 등이 1위에 올랐다. 그는 2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전국적인 인기 스타였다.

●"나의 노래를 부르겠다"

스티비 원더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마빈 게이는 거북이처럼 느리긴 하지만 계속 전진했다. 1963년 발표한 싱글 ‘Pride and Joy’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가 빌보드 차트 톱10에 진입했다. 모타운 소속의 디바 태미 테렐과 함께 부른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7)로 그는 유명세를 탔다. 마빈 게이의 첫 1위곡은 1968년 내놓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이었다. 이 곡으로 그는 7주 동안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석권했다.

1968년은 격동의 해였다. 프랑스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도한 ‘5월혁명’이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히피문화가 급속히 확산됐다. 켄트주립대생 4명이 반전시위를 하다 주 방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때였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마빈 게이는 미국인이 겪고 있던 고통과 슬픔, 평화를 향한 메시지를 담은 ‘What’s Going On’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어머니, 어머니. 너무나 많은 어머니들이 울고 있어요. 형제여, 형제여, 형제여. 너무나 많은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우리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오늘 여기 사랑을 가져오기 위해.”(What’s Going On 가사의 일부)

베리 고디 모타운 사장은 이 앨범을 발표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노래에 담아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빈 게이는 2년 넘게 모타운과 싸웠다. 결국 그는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권한을 얻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뒤 나온 앨범 ‘What’s Going On’(1971)은 대성공을 거뒀다. 앨범 수록곡 중 ‘What’s Going On’ ‘God is Love’ 등 4곡이 빌보드 톱10에 진입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 800만장이 팔렸다. 사회성이 짙은 노래도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 혼자서 작곡 연주 프로듀싱까지

스티비 원더도 마빈 게이의 모습을 보고 자신 역시 음악을 통해 사회에 메시지를 전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1971년 모타운과 재계약을 앞두고 ‘앨범 제작에 관한 모든 통솔권을 자신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조건을 내세워 관철시켰다. 스티비 원더는 스스로 제작한 첫 앨범 ‘Where I’m Coming From’을 내놓았다. 마빈 게이가 ‘What’s Going On’를 내놓기 한 달 전인 1971년 4월이었다. 스티비 원더는 이듬해 가을 발표한 음반 ‘Talking Book’을 히트시켰다. 앨범에 수록한 모든 곡의 작곡은 물론 연주와 프로듀싱도 혼자 했다. 1973년 발표한 ‘Innervisions’는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그래미상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다. 이후 1974년 발표한 ‘Fulfillingness’ First Finale’와 1976년 선보인 ‘Songs in the Key of Life’도 그래미상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다. 세 장의 앨범이 연속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된 것은 스티비 원더가 유일하다.

● 전설로 남은 마빈 게이

마빈 게이는 1982년 모타운을 떠나 컬럼비아사로 이적했다. 그해 내놓은 앨범 ‘Midnight Love’는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올랐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1984년 4월1일. 생일을 하루 앞둔 그는 총탄을 맞았다. 심한 말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마빈 게이가 땅에 묻히던 날 수만명의 조문객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는 금장이 박힌 흰색 군복 스타일의 마지막 무대의상으로 관에 안치됐다. 스티비 원더가 그를 떠나보내는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스티비 원더는 마빈 게이의 앨범 ‘What’s Going On’ 발매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지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를 위한 헌정 콘서트를 열었다. 스티비 원더에게 마빈 게이는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정신적인 스승이었다. 스티비 원더는 지금도 솔 음악의 산증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김인선 한국경제신문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