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스버그- 하이네켄

비슷한 녹색 병. 똑같은 녹색 로고. 여기에 공통적으로 로고의 중앙에 박힌 ‘붉은 표시’까지…. 칼스버그와 하이네켄의 겉모습은 얼핏 봐서 분간이 가질 않는다. 마트에서 하이네켄을 사려다가 칼스버그를 집어 드는 경우도, 펍에서 칼스버그를 마시는 사람을 보면서 하이네켄을 먹는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적어도 두 맥주의 ‘고향’인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 맥주는 양국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칼스버그는 덴마크 왕실의 공식 맥주로서 안데르센과 더불어 덴마크의 ‘2대 자랑거리’로 꼽힌다. 하이네켄의 전 최고경영자(CEO)이자 창업주의 손자인 알프레드 하이네켄은 하이네켄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공로를 인정받아 ‘네덜란드의 맥주왕’으로 불린다. 양사는 매출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기록을 자랑한다. 영국 맥주산업 조사기관인 ‘플라토 로직’에 따르면 2009년 유럽에서 가장 많이 맥주를 판 회사는 하이네켄(11억ℓ)이었고 그 다음은 칼스버그(8억ℓ)의 차지였다.

[세기의 라이벌] 최고의 맥주를 향한 열정…100년 넘게 '톡 쏘는' 대결

●'최고의 맥주'를 꿈꾼 두 남자


칼스버그의 창립자는 제이콥 크리스찬 제이콥슨(1811~1887). 1847년 제이콥슨은 24세의 나이에 자신만의 맥주 양조장을 꾸렸다. 그리고 장남인 칼(Carl)의 이름과 언덕(berg)을 합쳐 ‘칼스버그’라는 사명을 만들었다. 그는 ‘어떤 방식의 발효법이 오랫동안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하면발효(라거)’ 방식을 선택했다. 당시에 일상화된 발효방식은 발효액 위에 효모를 띄우는 ‘상면발효법’이었다. 그러나 제이콥슨은 하면발효법이 맥주맛을 더 부드럽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칼스버그 맥주는 대히트를 쳤다. 현재 세계 맥주시장의 90%는 하면발효 맥주가 차지하고 있다.

칼스버그보다 17년 뒤늦은 1864년 하이네켄을 창업한 제라드 아드리안 하이네켄(1841~1893)은 제이콥슨 못지않게 맥주맛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유행을 주도하고 있던 하면발효법으로 맥주를 생산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연구한 끝에 ‘맥주맛을 좌우하는 것은 효모’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루이 파스퇴르의 제자인 하토크 엘리언 박사를 고용해 1886년 하이네켄 고유의 효모인 ‘하이네켄 에이-이스트’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효모는 하이네켄 특유의 쌉싸래한 맛을 구현하는 주요 성분이며 지금도 전 세계 하이네켄 공장에서는 이 효모를 사용한다.

● 예술적 취향 vs 워커홀릭

유럽 1, 2위를 다투는 맥주 브랜드들이지만 대중이 이들을 기억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칼스버그는 덴마크에서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1805~1875)과 함께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 안데르센과 칼스버그의 창업자 제이콥슨이 절친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제이콥슨은 열정적인 예술작품 수집가였다. 동시에 예술적인 건축물 설립에 기부하거나 각종 예술작품을 국가에 내놓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코펜하겐시에 ‘인어공주’의 동상을 기부한 것이다.

반면 제라드 하이네켄은 제이콥슨 같은 ‘여유’가 없었다. 그는 지독한 ‘워커홀릭’으로 자신이 설립한 하이네켄을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유지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골몰했다. 목표는 하이네켄을 신사들이 마시는 고급 술로 자리잡도록 하는 것. 하지만 시장은 하이네켄의 뜻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비슷한 가격대의 고급맥주들이 늘어나면서 하이네켄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결국 1869년에 이르러 노동자들이 마시는 저렴한 술을 생산했다. 하이네켄은 이 같은 부침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목표인 고급 맥주를 생산할 수 있게 됐는데, 바로 1874년 3000㎡의 대형 양조장을 설립하면서다.

●'축구=맥주' 공식의 선구자들

유럽 축구클럽대항전인 챔피언스리그에 하이네켄이 있다면 유럽 국가들의 자존심을 겨루는 ‘유로컵’에는 칼스버그가 있다. 칼스버그는 1990년부터 홍콩축구협회가 주최하는 ‘홍콩 구정 대회’의 스폰서를 맡고 대회 이름을 ‘칼스버그컵’으로 바꿨다. 칼스버그라는 브랜드는 순식간에 아시아 대중들의 뇌리 속에 각인됐다. 유럽 축구팬들에게는 프리미어리그 구단인 리버풀의 스폰서로도 유명하다. 칼스버그 로고가 찍힌 리버풀 유니폼은 리버풀의 상징이다. 2009년 리버풀과의 17년 인연에 종지부를 찍은 칼스버그는 차기 유럽 파트너로 영국축구협회(EFA)를 선택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에는 비공식 후원사로서 ‘앰부시(매복)’ 마케팅을 펼치면서 공식 후원사인 버드와이저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이네켄은 2006년부터 챔피언스리그의 공식 파트너로서 남성과 축구팬들을 향해 끊임없는 구애를 펼쳤다. 2010년부터는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시티와 공식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하이네켄의 스포츠 마케팅은 축구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1995년부터는 유럽 국가들의 럭비 대회인 ‘하이네켄 컵’을 창설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스포츠는 곧 남성이고, 남성은 곧 맥주다’라는 공식에 입각해 확고한 타깃 마케팅을 펼친 것이다.

●M&A 결실은 아직 미지수

2009년 2월은 두 회사의 희비가 교차된 때다. 2008년 하이네켄의 순이익은 전년 대비 74% 급감한 반면 칼스버그의 순이익은 전년 대비 11% 올랐기 때문이다. 인수·합병(M&A) 전략이 명암을 갈랐다. 양사는 2008년 2월 컨소시엄을 구성해 영국 맥주회사 ‘스코티시 앤 뉴캐슬(S&N)’을 공동으로 인수했다. 하이네켄은 영국 법인을, 칼스버그는 프랑스와 러시아 법인을 각각 나눠 갖기로 합의했다.

당시 투자금액은 110억3000만달러로 회사가치에 비해 비싼 금액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년이 지난 후 양 회사의 수익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칼스버그가 사들인 프랑스 러시아 법인은 호조를 보인 데 비해 하이네켄의 영국법인은 기대했던 실적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이네켄은 공격적인 M&A를 멈추지 않았다. 2009년 12월 아시아 퍼시픽 브루어리(APB)의 인도 자회사 APB인도를 인수하고 인도 맥주사업에 뛰어든 것. 한 달 뒤에는 멕시코 ‘펨사’의 맥주사업을 인수했다. 여기에는 신흥시장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겠다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 전체 매출 중 신흥시장 비율은 기존 32%에서 40%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모든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힘이 달리는 모습이다. 매출 및 수익 증가세 둔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칼스버그 역시 순탄치 못한 상황이다. 선진국들의 경기침체와 전반적인 맥주시장의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2009년 이후 다양한 방식의 경비절감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올해 2월 발표된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4.2% 하락한 98억크로나에 머물렀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은 지금도 칼스버그와 하이네켄이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맥주라는 점이다. 양 브랜드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 맥주 본연의 맛에 천착했던 지속적인 혁신은 누구도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없는 무게를 갖고 있다. 제이콥슨은 생전에 업(業)의 본질을 이렇게 갈파했다. “양조업은 현재의 이익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제조 과정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목적을 둬야 한다.”

윤희은 한국경제신문 기자 s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