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이 결국 구제금융을 받는다. 스페인 은행권이 위험한 상태에서 17일 그리스가 총선을 치르는 것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다. 긴축을 거부하는 그리스 좌파가 정권을 장악하면 글로벌 금융시장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원 규모는 당초 예상보다 큰 최대 1000억유로(약 146조원)에 달한다. 더 이상 스페인 위기설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다. 루이스 데 귄도스 스페인 경제장관은 지난 9일(현지시간) 마드리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은행권 자본을 확충하기 위해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스페인은 유로존에서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에 이어 네 번째로 구제금융을 받게 됐다. 스페인 구제금융에는 긴축 조치 등 강제적인 조건이 따라붙지 않는다. 스페인이 긴축정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이 비교적 탄탄한 것도 조건이 따라붙지 않은 이유다. 따라서 이번 구제금융은 스페인 은행위기가 재정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위기로 '스페인 함대' 침몰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만 해도 스페인은 유럽 4위의 경제대국으로 불렸다. 그러나 은행 부실로 1000억유로의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스페인 함대를 침몰시켰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자 은행의 부실자산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은행 부실은 국가 신인도 하락으로 이어졌다. 스페인은 이번 긴급자금 수혈로 한숨 돌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제금융으로 인한 국가부채 증가와 신뢰도 추락은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스페인이 구제금융을 받게 된 직접적 이유는 부동산 대출이 부실화됐기 때문이다. 현재 스페인 금융권의 부동산 대출 규모는 약 4000억유로. 이 중 1800억유로는 사실상 회수 불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스페인에서 재연된 셈이다. 스페인 위기는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시작됐다. 1999년이었다. 유로존 가입 전 연 12.75%(1995년)에 달했던 10년 만기 스페인 국채 금리는 가입 후 계속 낮아졌다.

[Focus] 스페인에 구제금융 150조 투입…유로존 붕괴 막을까?
#과도한 복지·부동산 침체가 원인


저금리는 부동산 붐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금융권은 대학생들에게까지 돈을 빌려주면서 부동산 구매를 부추겼다. ‘스페인 축제(Spanish Fiesta)’라는 말까지 나왔다. 스페인은 1994~2007년까지 연평균 3.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부동산 호황이 경제성장으로 이어진 셈이다. 스페인 국내총생산(GDP)에서 건설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1.4%로 독일(6.2%)의 약 2배에 달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거품은 급속히 꺼졌다. 2008년 이후 스페인 부동산 가격은 고점 대비 약 25% 추락했다. 내년 말까지 15%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부동산에 기댄 경제성장이 멈추자 경제여건은 급속히 악화됐다. 실업률은 2007년 8.3%에서 2009년 18%로 높아졌다. 올해는 25%대까지 치솟았다.

과도한 복지도 문제였다.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전 총리와 마리아노 라호이 현 총리가 연금수령 연령을 높이고 긴축정책을 도입하기 전까지 스페인 사람들은 은퇴 전 15년 평균급여의 85%를 연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학비, 의료비도 공짜였다. 전체 공공지출의 66%가 사회보장 관련 비용이다.

#'축제의 대가' 몇년은 더 치러야

스페인은 이번 구제금융에도 축제의 가혹한 대가를 몇 년은 더 치러야 한다. 라호이 스페인 총리도 이를 인정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올해 경제성장률은 약 -1.7%로 향후 최소 3년간은 경기 침체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민들에게 “실업률은 더 높아지고 기업은 투자자금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될 것”이라고도 했다. 감내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구제금융의 효과에 대해서는 “금융회사 붕괴를 막아 유로화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지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스페인 경제 문제 해결보다는 유로화를 지키는 것이 구제금융의 더 중요한 목표였다는 것을 시사한 대목이다.

스페인은 이미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경기 침체에 빠졌다. 여기에 1000억유로의 빚이 더해지면 경기부양에 나서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구제금융은 성장을 통한 경제 회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셈이다. 영국 가디언은 “스페인 구제금융이 유럽 금융 시스템 마비를 막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스페인 경제에는 큰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구제금융이 스페인 은행에도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스페인의 금융위기를 막을 수 있는 핵심 조치는 스페인에 돈을 맡겨도 안전하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라며 “이번 구제금융으로 스페인 정부는 국민과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잃었다”고 평가했다.

전설리/임기훈 한국경제신문 기자 shagg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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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동맹' 구상 유로존 위기 해법될까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 해법으로 ‘은행동맹(banking union)’ 구축 방안이 떠오르고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주도로 유로존 전체 민간은행을 일괄 감독하고 공동으로 예금 보장과 유동성 지원을 시행하는 시스템이 추진되고 있는 것. 하지만 유로존의 ‘맏형’인 독일이 “중장기 과제로 검토해볼 수 있다”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전면 시행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집행위원장은 최근 유로존 역내 민간은행에 대한 감독 강화, 은행 간 상호 예금 보장, 공동 구제기금 조성 등을 주내용으로 하는 은행동맹 구상을 발표했다. 스페인이나 그리스 등 재정위기국에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으로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로존 금융권 전체를 묶어 상호 지원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각국 정부 돈을 모아 만든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통해 부실 은행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것에 비해 국민 세금을 덜 쓰게 된다는 특징이 있다.

은행동맹 구상은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가 “유로존 은행들이 단일 금융감독기구의 감시를 받으면서 EFSF 등의 자금을 직접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한 뒤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오는 28~29일 EU 정상회의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뤄질 예정이다. “은행동맹은 유로존 재정 통합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블룸버그통신)이란 기대도 나오고 있다. 은행동맹 성공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 시선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