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쉐린-브리지스톤

[세기의 라이벌] 자전거 수리상vs버선가게 주인…타이어 상식을 깨다
2005년 9월 자동차 경주 포뮬러원(F1)에서 예상치 못했던 이변이 일어났다. 세계 최고의 레이서 미하엘 슈마허를 제치고 페르난도 알론소라는 스물네 살 청년이 챔피언에 오른 것. 승패는 타이어에서 갈렸다는 분석이 쏟아졌다. 브리지스톤 타이어를 장착한 슈마허의 페라리팀은 6년째 1위를 고수하다 3위로 밀려났고 미쉐린 타이어를 장착한 알론소의 르노팀과 맥라렌 메르세데스팀이 모두 1, 2위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적으로 미쉐린에 앞서있던 브리지스톤으로선 자존심을 크게 구기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두 회사의 불꽃 튀는 신경전이 시작됐다. 전문가들은 “경주용 자동차 ‘머신’과 스타 레이서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F1 경기가 두 타이어 업체의 대결로 뒤바뀌었다”고 평가했다.

2007년부터 단일 회사의 타이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F1 경기 규정이 바뀌면서 두 회사의 맞대결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지만 양사는 지금도 전 세계 타이어시장에서 점유율 1, 2위를 다투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자전거 수리상이 타이어 개발

미쉐린과 브리지스톤은 처음부터 자동차 타이어 제조로 출발한 기업이 아니다. 미쉐린의 역사는 자전거 브레이크 패드에서 시작됐다. 1891년 프랑스 파리에서 남쪽으로 400㎞ 떨어진 클레몽 페랑시. 미쉐린의 창업주인 앙드레 미쉐린(당시 38세)은 동생인 에두아르 미쉐린(당시 32세)과 함께 마차 바퀴용 고무 브레이크 패드를 생산하는 11만8000여㎡ 규모의 공장을 운영했다.

하루는 자전거 경주 선수가 자전거를 수리해달라고 찾아왔다. 당시 자전거는 쇠바퀴 부분에 고무 타이어를 부착했기 때문에 펑크가 날 경우 수리하기가 어려웠다. 미쉐린 형제는 방법을 찾던 중 오늘날처럼 탈부착할 수 있는 타이어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수리 시간도 15분밖에 걸리지 않는 혁신적 제품이었다.

큰돈을 번 미쉐린 형제는 4년 뒤인 1895년 직접 제작한 ‘번개’라는 명칭의 자동차를 몰고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가했다. 이 자동차는 세계 최초로 공기 주입식 타이어를 장착해 미쉐린 형제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1895년 미쉐린 형제는 본격적으로 타이어 생산을 시작했다. 1914년에 타이어 교환을 손쉽게 한 탈착식 강판 호일을 개발했고 1920년엔 저압 타이어를 개발했다. 1929년에는 철도용 공기타이어를, 1937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스틸 코드를 사용한 ‘메탈릭’ 타이어를 출시하면서 타이어 전문 기업으로 승승장구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버선가게가'車 신발'제조

반면 브리지스톤의 출발은 버선 제조회사였다. 브리지스톤의 창업자 이시바시 쇼지로는 1906년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에 있는 구루메시 구루메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형 시게타로와 함께 아버지 도쿠지로가 가내수공업으로 운영하던 ‘시마야’라는 조그만 재봉점을 물려받았다. 당시 쇼지로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쇼지로는 비능률적인 재봉업을 포기하고 버선제조를 전문화하는 데 나섰다. 1918년 6월 자본금 100만엔으로 일본버선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매출이 늘자 1923년에는 고무밑창 작업화에 이어 고무구두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고무 산업의 주력은 천연고무의 60%를 소비하는 자동차 타이어였다. 쇼지로는 축적한 자본과 기술로 ‘자동차 신발’인 타이어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타이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사명과 상표명은 자신의 성 이시바시(石橋)를 영어로 바꾼 ‘브리지스톤’으로 정했다. 1931년 3월 브리지스톤 타이어 주식회사가 출범했다. 미쉐린보다 창립은 40년 늦었지만 이때부터 타이어 업계에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됐다.

●가족 경영체제로 성공가도

미쉐린과 브리지스톤은 20세기 초 타이어 업계의 후발주자에 속했다. 당시 최강자는 영국의 던롭. 여기에 자동차 대중화의 혁명을 일군 미국의 ‘빅5’ 굿이어 파이어스톤 굿리치 유니로열 제너럴 등의 회사가 세계 타이어 업계를 이끌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타이어 업계의 판도는 확연히 뒤바뀌었다. 브리지스톤이 1988년 파이어스톤을, 미쉐린은 1990년 굿리치를 각각 인수하면서 덩치를 키웠기 때문이다.

양사의 공통점은 가족경영의 안정성이라는 장점을 극대화했다는 것. 미쉐린의 경영권은 1931년 형인 앙드레 미쉐린이 사망하자 동생인 에두아르 미쉐린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7년 뒤에는 에두아르의 사위인 로버트 푸이서스가 바통을 잇는다. 에두아르의 아들 두 명이 모두 자동차 사고 등으로 사망해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위의 경영체제도 17년 만에 막을 내린다. 에두아르의 손자인 프랑수아 미쉐린이 경영에 뛰어든 것. 이때부터 미쉐린의 3세대 경영이 시작된다. 프랑수아 미쉐린은 래디얼 타이어의 성공에 탄력을 받아 본격적인 기업 인수·합병(M&A)에 나선다. 1981년 프랑스 타이어 메이커인 클레버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1990년엔 미국의 유니로열 굿리치 타이어 등을 인수했다.

미쉐린의 3세 경영이 정착될 무렵 브리지스톤도 2세 승계 작업이 한창이었다. 1963년 2월 쇼지로는 부사장이던 장남 이시바시 간이치로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회장에 취임했다. 쇼지로 회장은 1973년 5월 퇴임했다. 그는 퇴임사에서 “최고경영자가 바뀌어도 회사의 경영방침에는 조금의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간이치로 회장은 새 사장에 외부 인사인 시바모토 시게미치 부사장을 선임하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를 가미했다. 이때부터 브리지스톤의 공격적인 해외 확장이 시작된다. 1976년 인도네시아와 이란에서 생산을 시작했고 대만의 타이어 제조업체에 투자하고 타이어 생산시설도 인수했다. 창업자 이시바시 쇼지로는 사세 확장이 한창이던 1976년 9월11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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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 무는 기술혁신

두 회사는 기술혁신에서 양보 없는 경쟁을 펼쳐왔다. 공기 타이어는 1905년 이미 전 세계 자동차 타이어의 표준이 돼 있었다. 자동차의 성능이 점점 좋아지고 차량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타이어도 내구성과 제동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하게 개량됐다. 휠에 타이어를 붙이고 떼는 것이 쉽지 않았던 문제도 비드 부분에 와이어를 넣은 현재의 타이어 구조가 나오면서 해결됐다. 1920년대 들어서는 자동차의 승차감이 중요해지면서 저압 타이어가 개발됐다.

미쉐린은 탈부착 자전거 타이어와 자동차용 공기 주입식 타이어, 래디얼 타이어와 그린 타이어 등 세계 최초의 신기술을 양산했다. 튜브 없는 ‘튜브리스 타이어’(1947), 항공기용 래디얼 타이어(1981), 공기가 필요 없는 타이어(Tweel·2005) 등이 대표적이다.

브리지스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고성능 타이어 개발에 집중해왔다. 1980년대 초 펑크 난 상태에서도 시속 90㎞로 80㎞를 달릴 수 있는 ‘런플랫’ 타이어를 개발해 현재까지 500만개 이상 판매했다. 타이어 표면에 수백만개의 미세한 구멍을 뚫어 재빨리 노면의 물을 흡수, 배출하는 타이어도 개발했다. 두 회사는 타이어 부문 매출 기준으로 매년 1, 2위 순위 다툼을 벌이고 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은 브리지스톤이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타이어 비즈니스지는 “브리지스톤과 미쉐린이 경쟁하는 한 타이어의 발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예진 한국경제신문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