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55) 유고슬라비아의 역사와 혼합경제 체제
혼합경제체제는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어느 정도 비율로 혼합돼 있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1936년 폴란드의 경제학자 오스카 랑게(Oskar R. Lange·1904~1965)는 정부의 명령이 아닌 시장에 의해 자원배분이 이루어지는 변형된 사회주의 체제를 제안했다. 그의 이름을 따 랑게 모형(Lange model)이라 부르는 이 모형에서는 시장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모든 상품의 가격은 국가 중앙계획위원회가 조절한다. 즉, 자율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의 존재를 허용하는 대신 정부가 가격을 조절해 초과공급과 초과수요를 해소하는 체제인 것이다.

#유고연방의 실험

랑게에 따르면 이런 체제는 소비자의 선택의 자유와 소득분배 균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랑게 모형은 어떤 나라에서도 실행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상품의 가격을 정부가 일일이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정해진 가격을 따라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이윤동기가 발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랑게 모형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문제점을 지적 받았으며, 그중 상당 부분은 랑게 본인도 인정했다. 랑게 모형은 결국 현실에 적용되지 못했지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합친 체제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랑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현재의 세르비아·몬테네그로·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마케도니아 6개국으로 이루어진 연방국 구(舊)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랑게 모형의 단점을 보완한 독특한 경제체제를 실험한 바 있다. 유고슬라비아는 여타 동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치열하게 저항하여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한 국가이다. 티토(Josip Broz Tito·1892~1980)라는 강력한 지도자 아래 단결한 유고슬라비아는 독립 후 투쟁을 통해 스탈린의 간섭을 거부했다. 그 결과 유고슬라비아는 크렘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소련형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1950~1970년의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 추진된 ‘우리 자신의 사회주의에의 길(Our Own Road to Socialism)’은 세계 유일의 독특한 경제체제로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노동자 스스로 기업 경영

유고슬라비아식 사회주의의 핵심은 바로 ‘노동자경영제도’이다.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식 경제체제는 자본가 대신 국가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체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업을 노동자들 스스로 경영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자본주의의 인센티브까지 제공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자들의 아이디어는 법 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1949년 5월 슬로베니아 출생의 정치가 카르델리(Edvard Kardelj)는 의회 연설을 통해 기업경영에 있어서의 노동자 참여 확대를 역설했다. 그리고 1950년에는 의회에서 ‘국가 경제기업 및 상위 경제연합 관리에 관한 기본법’이 통과되어 노동자경영제도가 본격적으로 실행됐다.

노동자경영제도는 가족을 제외하고 5인 이상 고용한 기업은 노동자 전체가 주인이 되는 노동자경영기업이 되도록 한다. 노동자경영제도 하에서 기업의 최상위 의사결정기구는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다. 그러나 노동자들 모두가 평의회에 참여하기는 힘들므로 비밀투표에 의해 15~20명의 대표를 선출하였다. 평의회는 다시 투표를 통해 3~11명의 경영위원회(management board) 위원을 선출하며, 기업장(director)과 경영위원회는 기업을 직접 경영하는 임무를 가진다. 노동자경영제도의 특징 중 하나는 기업장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지 않고 회사의 수익을 서로 나눠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경영실적이 악화되면 해당 기업 노동자들의 소득이 줄어든다. 이는 한 기업 내에서는 소득격차가 없지만 업종 간 혹은 기업 간에는 소득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 체제가 존재?

체코의 경제학자 바넥(Jaroslav Vanek·1930~)은 유고의 노동자경영제도를 ‘참여경제모형’이라 명명했다. 그는 참여경제모형이야말로 자본주의체제가 갖는 이점은 모두 챙기고 폐해는 방지할 수 있는 궁극적 체제라고 평가했다. 회사의 수익을 공평하게 배분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을 할 것이며,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얼마나 팔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므로 경영의 자율성까지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경영제도는 시행 초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나 곧 여러 문제점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 기업의 목표가 총이윤 극대화가 아닌 노동자 1인당 이윤 극대화가 되다보니, 기존 노동자들은 새로 노동자들을 고용해 기업을 확장하기보다는 구성원들끼리 이윤을 나눠 갖고자 했다. 그리고 종업원이 5명 이상이 되면 경영권을 포기해야 하므로 조그만 회사들은 회사의 규모를 더 늘리려 하지 않았다.

문제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용과 해고가 노동자평의회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다 보니 근무에 태만한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웠고, 이익이 나면 노동자들이 그 전부를 나눠 달라고 요구하므로 미래를 위한 투자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55) 유고슬라비아의 역사와 혼합경제 체제
게다가 일반노동자들은 각종 보고서를 열람해야 하는 평의회 참여를 꺼려, 노동자 스스로 경영에 참여한다는 가치마저 모두가 원하지 않는 것이 돼버렸다.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경영체제는 결국 붕괴되고 말았는데, 이는 세상에 궁극적 체제란 있을 수 없으며, 사회주의 이념과 효율을 동시에 추구하긴 어렵다는 교훈을 전해준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


경제 용어 풀이

▶ 혼합경제(mixed economy)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섞여 있는 경제

▶ 노동자경영 (worker’s management)

노동자 자치관리 혹은 자주관리라고도 부른다. 노동자들이 선출한 대표들이 기업을 경영하고, 기업 수익을 노동자들이 나눠 갖는 유고슬라비아의 옛 제도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