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국민 90% 찬성해도 "안돼"…이익단체에 휘둘리는 국회
국회는 ‘민의의 전당’으로 불린다. 의원들이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하는 대의민주주의의 핵심기관이다. 그런데 최근 국회가 특정 이익집단들의 ‘민원 창구’로 전락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반 국민의 여론에 귀를 닫은 채 특정 집단의 이익을 우선해 입법활동을 벌여 빈축을 사고 있는 것이다. 국회가 특정 단체의 입김에 흔들리는 의원들로 채워지게 된다면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표류하는 약사법 개정안

대표적인 것이 감기약 등 가정상비약의 편의점 판매를 허용하는 ‘약사법 개정안’이다. 가정상비약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약국이 아닌 편의점에서 팔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90% 이상의 국민이 찬성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약사법 개정안은 매번 이런저런 논쟁에 부딪히며 15년 동안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회기에도 우여곡절 끝에 국회 전체회의를 넘기면서 드디어 통과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을 모았지만 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서 또 발목을 잡혔다.

이날 오전 국회 법사위는 의원들로 넘쳐났다. 의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에 대한 검찰수사,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문제를 놓고 열띤 공방을 벌였다. 그러다가 법안을 처리해야 할 오후가 되자 대부분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결국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약사법 개정안은 다시 물거품이 됐다.

보건복지위원회의 명단을 살펴보면 의혹이 커진다. 법안심사소위 위원 8명 가운데 신상진(대한의사협회장), 원희목(대한약사회장), 이애주(전국병원간호사회장) 손숙미(대한영양사협회장·이상 새누리당) 등 절반이 의약계 단체장 출신이다. 치과의사 출신인 전현희 민주통합당 의원과 한의사 출신인 윤석용 새누리당 의원까지 포함하면 6명이 의약계 출신이다. 보건복지위원장인 이재선 자유선진당 의원도 약사법 개정안에 강력히 반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에서는 약사회가 조직적인 입법 로비를 통해 약사법 개정을 막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3월 국회가 사실상 힘들어졌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어 약사법 개정안은 다음 국회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그토록 힘들었던 입법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총선 앞 이익단체 ‘목청’

‘약사법 개정안’뿐만이 아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이익단체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상인들로 구성된 전국유통상인연합회는 대형마트와 기업형수퍼마켓(SSM)의 지방 상권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이번 총선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을 국회에 진출시키기로 했다. 과학기술인을 대변하는 대한민국과학기술대연합은 이공계 인사의 국회 진출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또 중소기업단체들이 중소기업부 신설을 요구하는 등 각종 단체들의 압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일부 단체들은 “후보자들이 내세우는 공약에 따라 선거에서 낙천·낙선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선거를 앞두고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특혜를 줘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해 논란이 됐던 저축은행 예금자들에 대한 과도한 보호 주장이 그 사례다. 현행 예금자 보호 규정은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5000만원 이상의 원금과 이자는 정부(예금보험공사)가 보장해주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부산 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의원들은 지역 저축은행의 파산으로 손실을 입은 예금자들을 위해 5000만원 이상의 원리금을 특별히 보장해주자는 특별법을 만들려다가 제동이 걸렸다.

대의민주주의 ‘흔들’

대의 민주주의 아래서 이익단체의 정치활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더욱이 현대는 개인이나 집단이 요구하는 주장이나 가치가 다양한 다원주의(多元主義) 사회다. 이익집단들의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고 조정하는 일을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정치인들이 특정 집단의 이익과 이해를 과도하게 반영한다면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다수(多數) 국민의 이익이 침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익단체의 집단행동이 과도하면 과도할수록 정책의 일관성이 사라지고 정치·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약사법 개정안 불발 사태의 가장 큰 문제는 국민이 뽑은 ‘국민의 대표’가 국민이 원하는 일을 외면했다는 데 있다. 이는 선거에서 국민들이 던지는 한표 한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성명을 통해 “국민들의 요구로 어렵게 통과된 약사법 개정안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일부 국회의원의 행태로 인해 폐기될 상황에 직면했다”며 “국회가 지역구 챙기느라 민생법안 심사를 외면해버렸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만수 한국경제신문 기자 bebop@hankyung.com


<논술 포인트>

이익집단 정치는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할 수도 있지만 토크빌의 지적대로 ‘결사의 예술’이 발현될 수도 있다. 이익집단의 요구에 따라 정책이 바뀐 사례를 알아보고 그들의 정치활동이 민주주의에 미치는 긍정적·부정적 영향에 대해 논의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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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결의 환상 깨뜨린 '애로의 역설'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다수결로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예를들 어 A, B, C이라는 3명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됐는데 A는 짜장면을 가장 좋아하고 다음으로 비빔밥, 스파게티를 좋아한다고 하자. B가 선호하는 메뉴는 비빔밥, 스파게티, 짜장면 순이다. C에게는 스파게티, 짜장면, 비빔밥 순으로 선호서열이 있다. 세 가지 메뉴를 동시에 투표에 부치면 모든 메뉴가 한 표씩 선택되므로 어떤 메뉴도 과반수 이상의 선택을 받지 못해 메뉴를 정할 수 없다.

차선책으로 메뉴를 두 개씩 정해서 투표에 부쳐보자. 짜장면과 비빔밥을 올리면 짜장면 2표, 비빔밥 1표로 짜장면이 선택된다. 하지만 B와 C는 짜장면보다 스파게티를 더 좋아한다. 나머지 메뉴를 올려도 마찬가지다. 결국 구성원들의 과반수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어떤 메뉴를 선택지에 올리느냐에 따라 조작 가능성도 생긴다. 이것이 18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콩도르세의 이름을 딴 ‘콩도르세의 역설’이다.

A, B, C를 유권자에, 메뉴를 선거 후보자에 대입시켜보면 다수결 투표 원리가 우리의 생각만큼 합리적이며 민주적이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는 나아가 다수결로 사회적 선호를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공로로 197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학계에서는 이 ‘불가능성의 정리’ 이론을 “자본주의 경제학이 민주주의에 내린 사망선고”라고 평가했다. 애로의 이론은 선거 때 자주 거론된다. 선거 결과와 국민의 선호도가 일치하지 않을 때 이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