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라이벌] 엔초 페라리 vs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슈퍼카의 양대산맥… 탄생 순간부터 '자존심 대결'


‘슈퍼카(super car)’는 고급 스포츠카를 압도하는 고성능을 갖추고 독특한 디자인으로 희소가치를 자랑하는 차를 뜻한다. 한정 생산하기 때문에 가격도 럭셔리 브랜드 스포츠카의 2~3배에 달하기 일쑤다.이탈리아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는 일반 스포츠카를 압도하는 성능과 강렬한 원색, 독특한 디자인으로 슈퍼카의 양대 산맥이자 전 세계 자동차 마니아들의 로망이다. 엔초 페라리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각각 만든 두 브랜드는 탄생 순간부터 영원한 맞수였고 이들 간 경쟁은 곧 슈퍼카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 스포츠카에 미친 남자

두 창립자의 대결은 페라리가 창립한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철공소를 경영하던 알프레도 페라리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엔초 페라리는 열 살 때 레이싱 경기를 접한 후 자동차에 매료됐다. 열세 살 때 운전을 배운 페라리는 1919년 스포츠카 제작사인 CMN에 테스트 드라이버로 입사해 본격적인 레이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CMN이 파산하자 페라리는 이탈리아 최고 레이싱팀인 알파 로메오팀에 입단했다. 알파 로메오팀에서 좋은 성적을 내며 명성을 쌓아가던 페라리는 1929년 자신의 이름을 따 ‘스쿠데리아 페라리’라는 레이싱팀을 직접 만들었다.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그랑프리 경주팀으로 드라이버와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통틀어 가장 많은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팀은 슈퍼카 브랜드 페라리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처음 알파 로메오 차량 지원을 받아 F1 경주에 출전했다. 하지만 엔초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가 자신을 내쫓은 뒤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흡수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렸다. 페라리는 1939년 알파 로메오와 결별하고 직접 레이싱 차량 개발에 나섰다. 그리고 이듬해 ‘티포 815’라는 첫 작품을 내놨다. 이후 페라리는 ‘340 아메리카’를 비롯해 ‘250 유로파’ ‘375 아메리카’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유럽의 많은 레이싱 경주를 석권했다. 페라리의 모든 모델은 처음부터 고성능에 집중했다. 초기 자동차 생산 목적이 레이싱 우승을 통해 다음 경기 출전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우승에 집착했던 페라리는 결국 1951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마침내 세계 챔피언 알파 로메오 레이싱 팀을 꺾은 것이다. 페라리는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를 죽였다.” 자신을 최고의 레이서로 만들어줬지만 페라리의 믿음을 저버린 알파 로메오를 향한 복수의 한마디였다.

* 굴욕속에 자란 숙명의 라이벌


이처럼 페라리 탄생의 이면에는 알파 로메오에 대한 엔초 페라리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페라리의 라이벌인 람보르기니의 탄생 역시 엔초 페라리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페라리의 숙적,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1916년 레나초라는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기계에 관심을 보인 그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 직후에는 트랙터 제조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이 성공하면서 람보르기니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기업가로 떠올랐다. 그는 1948년 ‘밀레 밀리아’라는 자동차 경주에 직접 참가할 정도로 빠른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다. 밀레 밀리아는 이탈리아어로 ‘1000마일’이라는 뜻으로 1927년 시작된 초장거리 레이스다.

어느날 람보르기니는 자신이 구입한 페라리 차량의 클러치에 문제가 생기자 이를 알려주기 위해 엔초 페라리를 찾아갔다. 애정을 갖고 한 일이었지만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로부터 “트랙터나 만들던 사림이 슈퍼카를 어떻게 알겠소? 트랙터나 운전하시오”라는 굴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다. 결함을 인정하지 않는 페라리의 이 말 한마디는 또 다른 슈퍼카의 명가가 탄생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수모를 당한 그날 람보르기니는 “슈퍼카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 끝없는 경쟁


1963년 람보르기니는 스포츠카 제조회사를 설립했다. 페라리와 마찬가지로 사명에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 람보르기니의 첫 번째 원칙은 ‘무조건 페라리 자동차보다 빨라야 한다’였다. 페라리를 뛰어넘겠다는 람보르기니의 집념은 1964년 5월 현실로 나타났다. 람보르기니 최초의 자동차인 ‘350GT’를 내놨다. 이 모델은 최고 출력 270마력 최고 시속 230㎞의 성능을 갖췄다.

람보르기니의 350GT는 첫 작품치곤 훌륭했다. 하지만 페라리 최고 모델 중 하나로 손꼽히는 페라리 ‘250GTO’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50GTO는 1962~1964년까지 생산된 모델로 12기통의 배기량 2953cc짜리 엔진에 최고 출력 300마력, 최고 시속 280㎞의 괴력을 갖췄다.

람보르기니는 더 강력한 무기 개발에 나섰다. 마침내 1966년 적토마에 맞설 황소 미우라가 탄생했다. 페라리의 빨간 스포츠카와 대비되는 노란색의 미우라는 1966년부터 1972년까지 760대가 생산됐다. P400 모델은 최고 출력이 350마력에 달했다. 람보르기니 미우라의 출현은 페라리를 긴장시켰다. 미우라에는 페라리를 누를 첨단 기술이 숨어 있었다. 이 차는 미드십 엔진 방식을 적용한 최초의 양산형 슈퍼카다. 미드십 엔진 방식은 1950년대 말 F1 그랑프리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엔진을 운전석 뒤쪽에 배치해 차량의 전후 밸런스를 이상적으로 맞추는 것이다.

람보르기니의 이 같은 혁신은 페라리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페라리 역시 람보르기니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미드십 엔진 방식의 자동차를 출시할 수밖에 없었다. 308GT, 206GT 등이 그것이다. 람보르기니가 과거의 굴욕을 말끔하게 씻어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람보르기니는 “이제 페라리가 우리를 의식할 뿐 아니라 흉내까지 내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드십 엔진은 이후 란치아, 피아트 등에 적용되면서 슈퍼카 설계에 일대 혁명을 몰고왔다. 페라리를 넘어서기 위한 람보르기니의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우라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인 1976년 람보르기니는 ‘미드십 슈퍼카의 전설’로 불리는 쿤타치를 내놓으며 최고의 자리를 굳혔다.

* 경영난과 두 거인의 퇴장

스포츠카와 경주의 황제라는 명성과 달리 페라리는 행복하지 못했다. 1956년 외아들 디느가 심장병으로 죽었고 이듬해인 1957년에는 이탈리아 A급 선수였던 알폰소 데포르타고가 밀레 밀리아 경주에서 자신을 포함한 13명의 생명을 앗아간 사고를 일으켰다. 또 1950년대 말부터는 레이싱 경기에서 페라리팀은 점차 밀려났다. 설계를 바꾸고 새로운 모델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던 간부들은 페라리의 독단적인 경영에 등을 돌리고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피아트에 주식 50%를 양도하면서 겨우 자금난을 해소한 페라리는 1975년, 1977년, 1986년 F1에서 월드챔피언을 획득하며 기사회생했다. 1987년 창립 40주년을 맞은 페라리는 8기통 2936cc, 478마력의 엔진을 장착해 최고 시속 324㎞를 내는 걸작 ‘F40’을 내놓았다. 엔초 페라리의 유작이다. 그는 이듬해인 1988년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우라, 쿤타치 등 명차를 내놓으며 승승장구하던 람보르기니도 1973년에 불어닥친 석유 파동과 경제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결국 1974년 람보르기니는 파산을 선언했다. 그는 회사를 조르즈 앙리 로세티라는 스위스 사업가에게 매각하고 은퇴해 이탈리아 엄브리아주에 있던 그의 와이너리에서 와인 생산에 여생을 바쳤다. 라 포르리타에 있는 람보르기니의 저택은 테니스 코트와 람보르기니 차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서 그는 ‘미우라의 피’라고 불리는 ‘콜리 델 트란시멘트’라는 레드 와인을 생산했다. 람보르기니는 페라리가 숨을 거둔 5년 뒤인 1993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진석 한국경제신문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