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44)  허균의 '유재론' 과  저출산 · 고령화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 그는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아버지와 명문 강릉 김씨 가문의 자손인 어머니,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진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누이로 둔 전도유망한 양반가의 적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남다른 재주를 보여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황해도 도사(都事)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또한 문장이 높고 식견이 넓어 중국과의 외교업무를 도맡다시피 하였으며, 유교는 물론 불교와 도교, 심지어는 천주교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깊이도 대단하였다. 덕분에 우리는 그를 당대의 문장가이며 시대를 앞서 산 선각자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허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의 신분과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다. 그렇다면 허균은 왜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일까?

비참한 최우 맞은 허균

그의 죽음의 이면에는 조선시대에 뿌리 깊은 서얼 차별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의 자손 중 양인이나 천민 첩의 자손을 서얼(庶孼)이라 하여 적서(嫡庶)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서얼과 그 자손은 법률에 의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집안의 재산도 적자의 1/7~1/10 정도만 상속받을 수 있었다. 또한 가문의 대를 잇는 일에서도 차별은 극명하여 적자가 없는 집안은 서얼이 있더라도 양자를 들여 대를 잇게 하였다. 즉 조선시대의 서얼은 관직에 나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을 뿐더러 집안에서의 위치도 보잘것없는 무늬만 양반인 존재였던 셈이다.

“하늘은 재주를 고르게 주는데 이것을 문벌과 과거로 제한하니 인재가 늘 모자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첩이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진 이를 버리고, 개가했다고 해서 그 아들의 재주를 쓰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우리나라만이 천한 어미를 가진 자손이나 두 번 시집간 자의 자손을 벼슬길에 끼지 못하게 한다.”

이상은 허균의 저서 ‘유재론’의 한 대목이다.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허균은 양반가의 적자였지만 적서를 구분하는 당시의 사회풍토를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허균의 가족관계를 살펴보면 그의 사촌과 육촌 중에 서자 출신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스승인 이달 역시 서얼이었고, 평소 어울리던 사람 중에도 서얼 출신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마도 이런 환경이 그로 하여금 서얼 차별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하고, 그를 시대의 몽상적 개혁가로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하지만 서얼 차별을 뜯어고치고자 했던 허균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광해군 4년(1612년) 발생한 ‘칠서지옥’이 발단이 되었다. 칠서지옥은 일곱 명의 서자들이 상인을 죽이고 은을 강탈한 사건이다. 이들은 사실이 탄로나 붙잡힌 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북파의 꾐에 넘어가 역모를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허위 자백하였다. 한편 칠서 중의 한 명인 심우영을 제자로 두었을 정도로 허균은 이들과 교유하며 지내던 사이였다. 따라서 허균은 칠서와의 관계로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이에 대북파의 일인자격인 이이첨에게 부탁하여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이후 허균은 대북파와 정치적 동거를 하며 승승장구하지만,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역적모의에 휘말려 대역죄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허균이 꿈꿨던 차별 없는 세상은 그의 죽음과 함께 실현되지 못한 채 끝을 맺게 된 것이다.

뿌리 깊은 서얼차별 사회

그런데 최근 허균의 ‘유재론’과 유사한 주장이 제기되어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혼인 관계에 있지 않은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가리켜 ‘혼인외 출생자’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서얼과 흔히 말하는 사생아가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혼인외 출생자는 부(父)가 인지한 경우 법률적으로 혼인 중 출생자와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계 승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차별을 두고 있다. 또한 부에 의해 인지되지 못한 경우는 부계(父系)와는 친족, 부양, 상속관계가 성립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는 이들을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혼모와 그 자녀들은 사회적 편견에 불편함을 느끼고, 사회·경제활동에서 차별적 대우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혼외출산에 대한 사회인식의 변화와 혼외출산 자녀나 그 가정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저출산은 고령화와 함께 향후 한국경제의 선순환을 저해하여 성장의 발목을 잡을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1.23명으로, 전 세계 222개 국가 중 217위에 불과한 상황이다. 인구의 고령화 속도가 세계 최고인 상황에서 저출산으로 적정 인구가 유지되지 못하거나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든다면 노동인구가 감소하고 생산성이 떨어져 성장잠재력이 하락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또한 이런 현상이 지속되거나 가속화하면 연금과 건강보험 등 복지지출이 늘어 국가재정이 흔들리고, 소비와 투자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출산으로 국가경제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현재 세계 최하위권인 출산율을 끌어올려야 한다.

한편 한국을 비롯한 일본 대만 등 아시아의 선진국들은 서구에 비해 오랜 기간 저출산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는 아시아와 서구의 문화적·제도적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즉 아시아 선진국들은 전통적으로 결혼이 출산의 전제가 되어 왔고, 이러한 상황에서 만혼과 비혼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저출산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이들의 양육비가 상대적으로 높고, 사회 및 기업문화가 혼외출산에 비판적이고 여성들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는 점도 출산율 하락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혼인중 출산에만 국한되어 있는 보조와 지원을 혼외출산으로까지 확대하는 등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혼외출산을 바라보는 사회전체의 시각이 달라질 때 저출산 문제를 타개할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출산 해결에 도움될 수도

일각에서는 이런 주장에 대해 경제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인권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하고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혼외출산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자는 것은 가정의 가치를 파괴하고 사회적 윤리관에 어긋나는 발상이라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의 서얼 차별은 19세기 후반 갑오개혁을 계기로 완전히 철폐되었다. 허균이 ‘유재론’을 통해 폐지를 주장했음에도 30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혼외출산에 대한 인식 변화와 지원을 주장하는 의견도 수백년 후 ‘유재론’과 같은 평가를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저출산은 우리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조속히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원식 KDI 전문연구원 kyonggi96@kdi.re.kr

▨ 합계 출산율

한 여성이 평생에 걸쳐 출산할 수 있는 자녀 수의 평균으로, 일반적으로 연령별 출산율을 더해 산출한다. 통상적으로 합계 출산율이 1.3 이하면 초저출산 사회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