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인권조례, 교권을 무시하라는 게 아니죠!
문화 상대주의에도 보편적 '기준'은 있어야
신상털기, 알 권리를 위한 놀이는 아닌지…

요즘 네티즌들 사이에서 놀이처럼 번지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신상털기’이다. 일명 ‘코글링’이라고도 불리는 신상털기는 연예인 열애설의 주인공, TV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 등 유명인들의 신상정보를 찾아내 네티즌들 사이에서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정보가 공유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국 네티즌들은 우리나라의 뛰어난 온라인 정보체계를 바탕으로 아무리 꼭꼭 숨겨진 사람의 신상정보라도 찾아낼 수 있어 이들을 ‘네티즌 수사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신상털기가 요즘 도를 지나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어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신상털기로 인해서 사생활 침해가 이루어지고 그 때문에 많은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신상털기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성행하면서 신상털기 하는 법, 신상털기 예방법 등 이 행위와 관련된 규칙들도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다. 과연 신상털기가 이렇게 커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신상털기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SNS의 발전이다. SNS는 ‘Social Networking Service’의 약자로 온라인상에서 불특정 다수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서비스로, 네티즌들은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기존 인맥을 더 넓히거나 새로운 인맥을 만들어나간다. 가장 유명한 SNS의 하나인 ‘페이스북’의 경우 하루 순 방문자만 4000만명이 넘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SNS는 네티즌들의 신상털기 정보기반으로 작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인맥을 넓힐 수 있는 SNS를 이용해서 네티즌들은 신상을 털고 싶은 사람과 관련된 사람을 찾아내서 어떠한 정보든지 다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요즘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유저가 되면서 스마트폰을 통해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한다. 자신의 현재 상황을 바로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되면서 신상털기는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예로 얼마 전 버스에서 노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외국인 남성의 동영상을 들 수 있다. 스마트폰 유저들은 이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퍼나르면서 이 외국인 남성의 신상정보를 알아내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얼마 가지 않아 이 외국인은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한 학교의 원어민 교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까지도 얼마든지 신상 노출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상털기를 놀이처럼 받아들이는 네티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미와 궁금증만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캐내고, 또 그 정보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며 신상정보가 노출되는 당사자의 입장은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상털기는 알 권리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네티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한 행동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신상정보가 노출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행동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범죄인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정보는 공개되어야 사건에 대한 오해가 생기지 않을 수 있지만 그 공개가 당사자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너무 지나치다면 그건 다수의 대중을 위해 한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셈이 된다.

우리는 이미 신상털기를 통한 악플과 그 결과로 일어난 유명인들의 자살을 많이 목격해 왔다. 꼭 누군가의 죽음이 알려져야만 우리가 온라인 수사의 해악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신상털기를 막기 위해 개인 정보 보호 시스템은 점점 강화되어가고 그럴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황폐해져만 간다. 나와 남 사이에 소통의 장이었던 SNS가 오히려 참된 소통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21세기에 꼭 한 번 되돌아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아닐까 한다.



백세린 생글기자(용화여고 2년)seryn3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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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인권조례, 교권을 무시하라는 게 아니죠!

지난 10월, 여중생이 교사와 머리채를 잡고 몸싸움을 벌인 사건이 보도되었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생인권조례가 발표되기 이전에 우리 사회는 학교의 주인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많은 학생들은 자신들이 선생님들의 권위에 억눌려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좀 다르다.

최근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학생의 의견을 많이 수렴하였고, 학생들의 인권 침해 문제도 발생하면 바로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로 드물어졌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의견을 존중해주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무시하는 일이 많아졌다. 학생들이 교권은 무시하면서 자신들은 당연히 지켜야 할 학생 생활 규정조차 지키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학생 인권 조례가 발표된 이후, 일부 학생들은 이를 빌미로 학생 본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선생님들이 숙제를 내라고 하는 것조차 인권조례에 어긋나는 인권침해라며 반박하는 경우도 있다. 학생 생활 규정을 위반한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조차 선생님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일이 되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이 과연 학생들의 인권 존중과 교권 존중이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학생들이 학생 인권 조례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 인권 조례의 주된 목적은, 교권과 학생 인권의 상생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학생 인권 조례가 단지 학생들만의 인권을 지키는 무기라고 생각한다. 선생님들이 학생 인권 조례에 따라,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면 학생들도 교권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를 행복한 곳으로, 또 학생 자신의 삶을 바람직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 될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 자신을 바르게 보호하기 위한 규칙이다.


노명호 생글기자(김포외고 2년) pikipi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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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상대주의에도 보편적 ‘기준’은 있어야

몇 년 전부터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등 이전에는 ‘원시’ 문화라고 여겼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진 접근이 늘어났다. 인간 사회는 이 새로운 시각을 문화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문화 상대주의는 절대적인 기준점을 제시해두고 각 문화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이는 경제 강국, 소위 선진국들의 문화만 우월하게 보는 문화 절대주의를 비판하며 좀 더 알맞은 문화의 비교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 상대주의는 아프리카와 같은 타문화권에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문화까지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인류가 진보하는 길목에 아주 중요한 가치관이 아닌가 싶다. 각자 숭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중요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의 문제의 답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 된 지구촌이 아니라 선진국의 일방적인 선포이자 압력일 뿐이다. 이렇게 문화 상대주의는 문화 절대주의에 상반되어 각 문화의 개성을 수용하면서 서로의 장점을 비교하여 더 나은 인간 사회를 만든다.

그런데 이런 문화 상대주의가 심화하여 기준점 없이 타문화를 받아들이면 극단적 상대주의가 된다. 이 경우 이렇다 할 기준이 없어져 혹은 특정 문화가 인권을 짓밟거나 인류 보편적인 윤리에 어긋난다 해도 그 가치를 인정해준다. 결과적으로 한쪽에서는 인권 보호 운동을 열렬히 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할례와 같은 여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관습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아이러니가 펼쳐지는 것이다. 서로의 문화를 인정해주는 것은 옳은 관점이지만 이 문화가 인간의 생존권과 존엄성까지 위협한다면 분명히 비판받고 개선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준 없는 문화 상대주의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옳지 않다.

지구에는 수많은 인간이 살고, 인간들은 저마다의 생활환경 아래 수천, 수백 년 전부터 고유의 문화를 이루었다. 그런데 최근 몇십 년 동안 지구촌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선진국들의 편리를 위해 열등하게 여겨지는 국가들의 문화적 희생이 당연시되었다. 무조건 선진국의 문화가 우월한 것이라고 여겨져 다른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의 문화는 미개한 것이므로 선진국을 본받아야 한다는 관념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한 민족의, 혹은 한 국가의 전통적인 문화가 선진국의 문화라는 절대적 기준 아래 등급이 매겨져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인류의 보편적인 기준 내에서 각국의 문화가 존중받고 서로의 문화를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다양성을 갖춘 인류가 장기적으로 살아남는 방법이다.

제갈현 생글기자(이화여자외고 1년) gus0gy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