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조건에 따라 읽는 범위 제한해야
[생글 논술 첨삭노트] (84)서울대②
2011년 서울대 정시 기출문제의 1번 문제를 먼저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이 문제의 해설을 서울대 측이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해설하는 사람에 따라 답이 각기 다르게 나온다는 점입니다. 재밌게도, 이 문제는 분명 답이 정해져있어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푸는 사람마다 (그것도 논술을 업으로 삼는다는 강사들조차) 답이 서로 다릅니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문제 조건’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혹은 지나치게 긴 제시문에 긴장한 나머지 전체 내용을 모두 포괄하려다보니, 문제의 요구조건보다 더 큰 답안을 내놓은 것이지요. 실제로 응시 학생들 대부분이 1번 문제에서 큰 좌절감을 맛보았습니다.



▨ 읽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는가를 물어본 문제 1번

우선, 주제가 과학이었다는 점, 그것도 생소한 물리학이었다는 데에 가장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일반 인문계 학생들은 보통 학교에서 생물을 배웁니다. 그나마 암기를 하면서 대비할 수 있는 과목이니까요. 인문계열 학생들의 경우, 과학은 1학년 때 배우고 다시 배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므로,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다시 과학책을 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어느 문제가 나올지는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이 문제는 그런 내용을 안다고 풀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실제로 케플러의 법칙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요구하는 내용을 정확히 딱 지적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무려 8장으로 이뤄진 제시문을 이리 저리 펼쳐보면서 어딘지 살펴보는 일은, 제시문 사이를 <갔다 왔다>를 반복하는 일에 그치게 될 가능성 또한 큽니다. 지난 연재에도 밝혔듯이, 이 문제는 그저 독해력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떤 독해력을 측정하느냐가 다소 다릅니다.

예전 서강대에서 나오던 형이상학적 제시문은 그다지 긴 길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공불락의 제시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일정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유추하면서 뜻을 ‘해석’해내야 했기 때문이지요. (‘해석’이란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보세요!)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유사한 제시문이나 배경지식을 미리 익혀두어야 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지나치게 수준높은 제시문이었기 때문에, 접근 자체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런 류의 ‘해석해볼래?’ 문제는 아닙니다. 이 문제는 오히려 ‘너 책 잘 읽었니?’류의 문제인 셈이지요.

우선, 독서를 충분히 해보았다면 알겠지만 책의 길이란 짧게는 100~200쪽이겠지만, 좀 더 길어진다면 500~600쪽도 가능합니다. 교과서가 갖고 있는 핵심요약과 같은 형태와 달리, 일반적인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란 저자의 의도에 따라, 계획된 구성이 있습니다. 일정한 단계에 맞춰 내용을 점층적으로 이해하게 되지요. 저자가 그다지 난해한 글쓰기를 일삼지만 않는다면, 흐름에 따라 이해하게 되는 글읽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책읽기를 할 때, 일정한 사유기준에 맞춰 읽기를 시도합니다. 칸트식으로 말한다면, 일종의 ‘인식의 틀’ 혹은 ‘범주’이겠지요. 예를 들어 사회과학적 서적이라고 한다면 ‘저자는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좌파적, 우파적)’라든지, ‘이에 대한 접근방법으로 정량적인 시도를 하는가, 혹은 정성적인 시도를 하는가’ 등을 따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준에 따라서 책의 내용은 다르게 읽힐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과정은 소설책과 같은 문학 작품에도 그대로 투영될 것입니다. 서울대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일종의 책읽기를 유도한 것입니다. 다만 책을 읽긴 읽되 주어진 조건에 맞게 읽으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조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의도된 책읽기를 완수하는 최고의 방법이겠지요.



▨ 문제조건이 요구하는 바를 자신의 식대로 정확히 이해해야

그러므로, 무엇보다 요구조건에 따라서 읽는 범위를 정확히 제한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지요. 1번 문제를 보겠습니다.



논제 1. <제시문 2>는 행성의 운행 법칙이 밝혀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행성의 운행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과정을 <제시문 1>(가)에서 기술된 ‘과학 탐구 과정’에 따라 재구성해 보시오.



이미 논제에서 “우리는 행성의 운행 법칙 전체를 설명해줄거야. 그러니까, 너는 그 중에서 특정한 부분만 찾아야 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과학 탐구 과정’에 따라 재구성하는 것이지요. <제시문1>의 (가)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시험을 본 학생들이 가장 많이 저지른 실수는 1번에서 발견됐습니다. 문제의 인식, 즉 “이건 왜 이렇지?”라는 부분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시문이 이런 신호를 몇 번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가령 <제시문2>의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태양 중심 체계를 더욱 자세히 연구하면서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에 불분명한 점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행성들이 무엇 때문에 그처럼 특정한 거리에 위치하는지에 대해 코페르니쿠스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케플러는 궁금했다. 왜 행성들은 그렇게 특정 거리로 떨어져 있는가? 왜 행성은 반드시 6개인가? 그리고 왜 신은 태양계를 하필 그런 식으로 설계했을까?”



분명 이 부분에는 “왜”라는 질문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므로, 문제인식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케플러의 전체 탐구과정에 대한 문제인식이지 <행성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을 찾아내는 과정의 문제인식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죠.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을 의심했다는 사실로부터 ‘그렇다면 화성을 연구해야겠군!’이란 결과가 도출될까요? 당연히 ‘화성은 왜 원운동의 형태가 아니지?’나 ‘화성으로부터 도출된 자료는 원에 대한 것이 아니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화성이 등장하는 이유는 화성이 주된 탐구대상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문제인식 부분을 찾는 것에서 한 차례 위기가 찾아오고, 가설을 찾는 데에도 위기가 또 찾아옵니다.

제시문을 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문제의 조건을 정리해 말하자면 케플러의 제2법칙으로부터 제1법칙(타원궤도의 법칙)이 도출되는 과정에서의 ‘과학 탐구 과정’을 찾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내용은 제시문의 뒷부분에 복잡해보이는 그림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설은 제1법칙 즉, ‘행성 궤도는 타원일 것이다’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관찰과 해석을 통해 의미있는 결론으로서의 제1법칙이 도출되면서 끝나겠지요. ‘내 가설이 맞았군!’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더라도, 제시문에는 이상한 곳에 가설이나 가정과 같은 단어들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에 오해하기 딱 알맞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오해를 물리치고, 당연히 문제조건에 따라서 특정한 부분만을 읽어내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설이 설정되는 바로 그 부분, 그리고 그런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 ‘문제인식’이 있겠지요. 그 부분은 고작 다음과 같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관측된 위치와 이론적으로 예상된 위치 사이에 8분(1도=60분) 정도의 각도가 어긋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차이였다. 티코 이전이라면 그것은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8분의 각도를 가지고 6년을 힘들게 연구했다는 사실은 케플러가 얼마나 과학적 사고에 투철했는지를 말해 준다. 그런데 바로 이 8분의 오차를 규명하기 위해 케플러는 화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다른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으로부터 결론까지 도출되는 부분까지의 거리는 매우 짧습니다. 당연히 행성 운행법칙에 관한 케플러의 세 가지 법칙이 도출되는 과정을 모두 설명하고 있는 제시문이니, 제1법칙(그것도 제2법칙에 비해 늦게 발견된)에 대한 부분은 제한적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문제는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고, 소녀의 죽음이 암시되는 부분을 찾아봐’하는 류의 문제랑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체 부분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내는 것이지요. 결국, 그다지 높은 난이도도 아니고, 애매모호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함정이 있었던 만큼 변별력은 있었겠지요. 다음 시간에는 이어서 문제 2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용준 S·논술 선임 연구원 sgsgnot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