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킬비 - 로버트 노이스
●'수의 횡포'를 뛰어넘어라
●상호 보완의 발명
●고든의 꿈을 훔쳐간 테크니션
잭 킬비 - 로버트 노이스
[세기의 라이벌] '數의 횡포' 넘자 반도체 칩이란 신대륙이 나타났다
발명의 역사에서 마이크로 칩 또는 반도체 칩으로 더 잘 알려진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개발을 둘러싸고 잭 킬비와 로버트 노이스,두 사람이 벌인 경쟁은 유례가 없다. 집적회로가 태어나기까지는 두 가지 난제가 있었다. 첫째는 하나의 조그만 기판 위에 전기회로의 모든 구성 요소를 어떻게 올려 놓을 것인가,둘째는 이 구성 요소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킬비는 첫째 문제에서 출발하고 노이스는 둘째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둘 다 집적회로라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두 사람은 만난 적도 없고 서로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같은 생각을 하고 거의 동시에 집적회로를 탄생시켰다. 1950년대 엔지니어들은 탐험의 시대를 살았던 항해사들과 같은 심정이었다. 항해사들은 저 바다 건너에 신대륙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지만 그 길을 여는 게 쉽지 않았다. 엔지니어들은 저 장벽만 넘으면 더 정교하고 복잡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전기회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벽은 높고 험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수의 횡포(the tyranny of numbers)’였다.

●‘수의 횡포’를 뛰어넘어라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에니악’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무게가 3만t이나 나가고 전깃줄로 얽히고 설킨 1만8000개의 진공관은 엄청난 전기를 먹어치웠다. 진공관은 열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타버려 끊임없이 갈아줘야 했다. 엔지니어들이 더 복잡한 전기회로를 디자인하려면 이내 수의 한계에 부딪혔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첫 번째 돌파구는 벨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월터 하우저 브래튼,존 바딘 세 사람이 열었다. 1947년 반도체 게르마늄을 이용해 진공관보다 훨씬 작고 열도 발생하지 않는 트랜지스터를 발명했다. 진공관을 트랜지스터로 대체하면서 회로의 크기,비용,효율과 안전성에 큰 도약을 가져왔지만 개별적인 부품들을 하나 하나 손으로 연결해야 하는 기본적인 구조는 바꾸지 못했다. 전기회로 구성에는 스위치,저항,콘덴서,다이오드와 같은 부품들이 들어간다. 엔지니어들의 꿈,예를 들어 로켓을 달에 보내는 것과 같은 꿈을 실현하려면 1000만개가 넘는 엄청난 수의 구성 요소가 필요하다. 이들을 하나하나 납땜으로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회로는 어느 한 곳이라도 연결에 문제가 생기면 전체가 멈춘다.

그리고 부품들이 너무 크고 전선이 너무 길면 전기신호가 빠르게 이동할 수 없다. 1950년대 엔지니어들은 이처럼 ‘수의 횡포’ 앞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서로 생면부지의 두 엔지니어 킬비,노이스가 이 장벽을 무너뜨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고독속에 피어오른 대발상
킬비는 외모만 보면 하이테크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신장 198㎝의 거구에 조용하고 온화한 표정은 시골 길에서 만나는 여느 농부와 다름없었다.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해 대부분의 업적들도 남의 도움 없이 이뤄냈다. 그의 연구들은 반도체 물리학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정작 자신은 과학자가 아니고 엔지니어로 불리기를 원했다. 킬비는 그 차이를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과학자의 동기는 지식이다. 그는 어떤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반면 엔지니어의 동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를 푸는 것,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

1958년 7월 말 킬비는 미국 댈러스에 있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라는 회사의 실험실에 앉아 있었다. 포켓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처음으로 만든 회사였다. 입사한 지 두 달도 안 된 34세의 킬비는 바캉스 시즌이 왔지만 휴가를 갈 처지가 아니었다. 실험실은 텅 비었고 생각할 시간은 많았다. ‘고독한 발명가’ 킬비로선 최적의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홀로 앉아서 회로를 만드는 비용을 분석하다 문득 아이디어가 섬광처럼 떠올랐다. ‘회로의 모든 구성 요소를 반도체인 실리콘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트랜지스터를 제외하고 콘덴서 등을 반도체로 만들려고 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회로 전체를 하나의 물질로부터 뽑아낼 수 있지 않을까? 더 작고 더 쉽게.’

그는 실리콘으로 만들 수 있는 구성 요소들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트랜지스터,다이오드,저항,콘덴서 등 이 모든 부품이 들어간 일체형 구조를 구상했다. 그때까지 엔지니어들은 부품을 소형화함으로써 ‘수의 횡포’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일체형은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한여름 쓸쓸한 실험실에서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킬비는 두 달 만에 엉성해 보이는 모형을 완성했다.

●고든의 꿈을 훔쳐간 테크니션

노이스는 그 유명한 ‘8인의 변절자’ 중 한 사람이다.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노벨상을 받은 윌리엄 쇼클리는 팰러앨토 남쪽 계곡(지금의 실리콘밸리)에 첫 전자회사를 세우고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들였다. 이때 합류한 사람 중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있었다. 자부심의 사나이, 쇼클리는 젊은 인재들을 도제처럼 다루며 수시로 연구과제를 변경했다. 젊은 과학자들은 행복할 수가 없었다. 미련없이 회사를 나와 1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를 설립했다. 쇼클리는 이들을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실리콘밸리 역사에서 중요한 ‘8인의 변절자’는 이렇게 태어났다. 이들은 쇼클리를 떠났지만 쇼클리의 꿈은 갖고 갔다.

노이스는 킬비와는 달리 사교적이며 운동선수와 같은 다부진 체격을 지녔다. 그에게는 이론물리학자,발명가,경영자,벤처자본가 등 다양한 타이틀이 붙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테크놀로지스트’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가 정의한 테크놀로지스트란 ‘리스크에 친숙한 사람들’이다. 바로 노이스가 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동료들에게 공개하고 그들의 공격을 기다린다. 동료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도 정리되고 누군가 허점을 찾아내면 그로부터 더 좋은 해결책을 도출한다.

1958년 31세의 노이스는 동료와 같이 세운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 실험실에서 트랜지스터 오염문제로 씨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동료 중 한 사람이 세 겹의 반도체 위에 실리콘 산화물을 입히는 아이디어를 갖고 왔다. 막을 입혀 외부의 오염을 차단하자는 것이다. 트랜지스터 기술의 중요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노이스는 이 아이디어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트랜지스터는 반도체를 세 겹으로 겹친 것인데 내부를 전선으로 연결하는 것은 아주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산화물 코팅에 홈을 내서 전선을 이으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이렇게 시작된 의문은 실리콘 산화물 코팅 위에 전선을 인쇄한다는 혁명적 아이디어로 발전했다.

●상호 보완의 발명

어느 날 노이스는 무어의 방으로 와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한 실리콘 블록 위에 인쇄한 구리 전선으로 두 개의 트랜지스터를 연결했다. 며칠 후 다시 와서 그 실리콘 블록에 수로처럼 낸 홈을 저항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며칠 후엔 그 블록에 축전기를 그려 넣었다. 1959년 1월 마침내 노이스는 노트 4페이지를 가득 채운 집적회로의 그림을 완성한다. 킬비보다는 6개월 늦었다. 그러나 앞선 것이 있었다. 킬비는 일체형으로 만든다는 아이디어에는 도달했지만 그때까지도 연결 방법은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반면 노이스는 연결 방법을 정립한 일체형 아이디어에 도달해 있었다. 이 점이 이후 벌어지는 법정 투쟁에서 노이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본인들보다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페어차일드 두 회사가 나서서 ‘누가 먼저냐’를 가리기 위해 10년을 엎치락뒤치락하지만 그 결말은 훈훈하다.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노이스의 손을 들어 주지만 그 전에 두 회사는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고 특허를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노이스와 킬비,두 사람은 명예보다 발명 그 자체에 기쁨을 느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상대의 성과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법적 판단이야 어떻든 과학사에는 집적회로의 발명자로 두 사람이 등재돼 있다. 노이스는 나중에 무어와 함께 인텔을 설립해 반도체 혁명을 이끌었고 킬비는 200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노이스는 1990년 사망해 이 영예를 누리지 못했지만 킬비는 수상 연설에서 집적회로 발명에 대한 그의 공로를 잊지 않았다.

이종천 IT칼럼니스트 jclee17@hotmail.com

잭 킬비

△1923년 미국 미주리주 제퍼슨시티에서 출생 △1947년 일리노이대 졸업,위스콘신대 전자공학 석사 △1958년 7월 집적회로의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두 달 후 모형 완성 △1967년 휴대용 계산기 발명 △2000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2005년 댈러스에서 81세로 사망

로버트 노이스

△1927년 미국 아이오와주 벌링턴에서 출생 △1949년 그리넬칼리지 졸업 △1953년 MIT 물리학 박사 △1959년 2월 집적회로의 아이디어 완성 △1968년 고든 무어와 함께 인텔 설립 △1990년 오스틴에서 62세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