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DNA를 믿어라

#글로벌리더는 개방의 선도자
[Cover Story] 경쟁의 DNA를 키우는 개방 … 열어야 산다
.인류의 진화는 개방의 역사 그 자체다. 개방으로 이물질과 섞이고, 그 이물질과의 융합으로 새로운 시너지를 분출해 냈다. 개방을 선도한 국가는 글로벌시대의 리더가 됐고, 개방을 두려움의 시선으로 지켜만 본 나라는 주변국으로 전락했다. 다소의 예외가 있다해도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분명한 진리다. 개방은 스스로의 경쟁력을 높이는 DNA를 활성화시킨다. 쇄국으로 민족을 지키고, 우리 것을 보존하자는 모토는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는 달콤한 구호일 뿐 21세기 글로벌시대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홀로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넓을 뿐더러 글로벌시대의 홀로서기는 윈윈의 지혜를 스스로 팽개치는 어리석은 행위다.

#한국의 DNA를 믿어라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무역 비중이 85%에 달한다. 국제무역이 경제성장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구조에서 개방은 분명 한국경제 성장의 키워드다. 하지만 개방의 길목에선 항상 갈등이 존재했다. 때론 정치권의 여야 간에, 때론 계층 간에, 때론 세대 간에 개방을 보는 시각이 달랐다. 개방의 찬성론자는 무역장벽을 제거해 글로벌시장에서 당당히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반대론자는 경쟁력을 높이기 전에 국내 산업이 고사된다고 목소리를 키웠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개방은 한국 경제를 글로벌 무대로 등장시킨 기폭제였다는 것이다. 한국의 개방 역사는 이를 잘 설명한다.

1994년 가전(家電)시장이 개방됐다. 관련 업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반대가 들끓었다. 당시엔 소니 마쓰시타 등 일본의 가전제품이 지구촌을 휩쓸었으니 우려는 더 컸다. ‘일본의 식민지’ ‘매국노’라는 선정적 구호가 진동했다. 한국의 가전제품은 소니 마쓰시타에 질식될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했다. 하지만 20년이 채 안된 현재는 어떤가. 삼성전자 LG전자 등의 ‘메이드 인 코리아’가 글로벌 시장을 휘젓는다. 위기에서 강해지는 한국인 특유의 DNA가 저력을 발휘한 결과다. 1996년 유통시장 개방 때도 ‘국내 유통업체 말라죽는다’는 슬로건이 난무했지만 월마트 까르푸 등은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오히려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으로 국내 유통업체들이 할인 및 서비스경쟁을 벌이면서 그 혜택이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갔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했다. 애니메이션, 만화, TV프로 등 일류(日流)가 판치던 당시에는 쇼킹한 선언이었다. 당연히 김 전대통령에게도 ‘식민지’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일본 문화에 종속되면 ‘우리의 것’이 없어진다는 문화계의 목소리는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꾸로 일본에서 한류(韓流)가 넘쳐난다. 일본을 잠식한 한류는 유럽, 남미로 거침없이 흘러간다. 세계는 K팝에 열광하고 춤을 춘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였던 ‘스크린 쿼터’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마디로 할리우드에 한국의 극장 문을 활짝 열어준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는 배우들의 우려는 말 그대로 기우로 판명됐다. 오히려 한국 영화의 관객점유율은 치솟았고, 할리우드에서 찬사를 받는 한국 영화가 늘어났다. 개방 때마다 식민지, 매국노 등의 구호가 난무했지만 결국 경쟁의 DNA를 자극해 역전승을 거둔 것이다.

#글로벌리더는 개방의 선도자

60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대 세계 최고의 해상세력은 명나라였다. 당시 중국의 해양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는 정화(鄭和)의 남해원정이 잘 설명해준다. 무슬림 가문 출신의 환관 정화는 문무(文武)에 출중한 능력을 겸비했고, 특히 이슬람 세계에 정통했다. 명 제국의 영락제는 그에게 거대한 함대를 구성해 인도양 세계를 탐사하라고 명령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행해진 정화의 해양원정은 60여척의 초대형 선박을 포함, 모두 300척이 넘는 배에 3만명의 장병이 동원됐다. 현재의 기준으로도 놀라운 규모와 위세다. 정화 선단은 30년에 걸쳐 인도양 세계 곳곳을 누비고 30여개국을 방문했다. 15세기에 바다를 지배할 강력한 우승후보는 단연 중국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규모의 해양프로젝트는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다. 북방 유목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의 관심이 내륙으로 쏠리면서 이후 명나라가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쌓아올린 만리장성을 바다에도 세운 셈이다. 중국이 바다의 문을 지속적으로 활짝 열었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아메리칸드림(American dream)’. 이 말이 갖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미국적인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꿈이다. 무계급 사회, 경제적 번영의 재현, 자유로운 정치체제 등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뜻한다. 과거의 사회적 지위나 인종에 관계없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꿈을 성취하는 희망의 아이디어다.

20세기 수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땅을 밟았다. 아메리칸드림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개방을 의미한다. 미국이 짧은 역사에도 세계 최강의 국가를 건설한 것은 어쩌면 모두를 포용하는 개방의 철학때문인지도 모른다. 영국이 대영제국을 건설한 것도, 로마가 팍스로마나 시대를 연 것도 궁극적으론 개방으로 국가의 경쟁력을 키웠기에 가능했다. 최근 코리안드림이란 말이 확산되는 것은 우리나라 개방의 문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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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적 세계사 합류 기회 놓쳐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은…

쇄국정책은 한마디로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이다. 정치·외교·통상에서 외국인의 입국이나 무역을 통제하는 정책이다. 국제적 고립상태 유지가 정책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판단할 때 취하는 조치다.

조선왕조는 병자호란(1636) 이래로 수세기 동안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기본적으로 쇄국정책을 고수해왔다. 사대는 중국, 교린은 왜국(倭國) 및 여진(女眞) 등에 대한 외교정책이다.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중국)를 받들어 섬기고(事大), 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交隣)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조선 개국 이래의 외교방침이다. 특히 중국에 대한 사대는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 올려 이를 뒷받침했다. 조선시대 쇄국정책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은 흥선 대원군(1820~1898)이다. 그는 청나라를 제외한 모든 외국의 문물을 철저히 배척했다. ‘양이(洋夷·서양 오랑캐)와의 화친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가 각지에 세운 척화비는 외국에 대한 적개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일시적으로 서양 열강의 침략을 막고 조선왕조의 전통문화를 유지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조선이 자주적으로 세계사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지적이 많다. 쇄국정책이 궁극적으론 외세의 무력적 간섭을 초래하는 부작용도 낳았다. 윤요호 사건 후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맺어 주권이 훼손됐으며 경쟁을 통해 체력을 키우지 못해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까지 겪었다. 돌고 도는 역사에서 흥선 대원군 쇄국정책의 허와 실을 한번쯤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