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Issue] 카다피 사망···하수구서 막 내린 '독재자의 최후'
“쏘지마! 쏘지마!”

42년간 리비아를 철권 통치했던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69)도 죽음 앞에선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카다피는 지난 20일 고향 시르테의 하수구에 숨어있다 시민군에 발각돼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영국 BBC방송은 “카다피가 시민군과 맞닥뜨린 순간 총을 쏘지 말라고 두 번이나 소리쳤지만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리비아의 국민적 영웅에서 독재자로 전락한 그의 삶은 ‘오래된 정권은 필연적으로 부패한다’는 명언을 떠오르게 한다.

# 국민 영웅에서 독재자로...

카다피는 27살이던 1969년 9월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다.

그는 정권 초기 많은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손질했고 교육 및 의료 혜택도 늘려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카다피는 국가원수에 오른 뒤에도 대통령 같은 직책을 거부했다.

1970년 총리직에 올랐으나 2년 뒤 이를 반납했다. 대신 쿠데타 당시 대위였던 자신의 계급을 대령으로 진급시킨게 고작이었다.

그는 1977년 리비아를 공화국 체제에서 ‘자마히리야(민중에 의한 정부란 의미)’ 체제로 바꿨다.

자마히리야는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결합한 리비아식 직접 민주주의로 카다피가 만든 신조어다.

카다피는 자마히리야 체제를 선언하며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도 없애버렸다.

카다피는 석유를 판 자본으로 대형 수로를 건설하는 등 국가 발전을 위해 기간산업에도 많은 투자를 했다. 그는 아랍권 젊은이들 사이에서 ‘아프리카의 체게바라’로 불렸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카다피도 다른 독재자들처럼 변해갔다.

혁명 핵심동지이자 총리인 압둘 잘루드 등 자신의 뜻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사람은 숙청해 나갔다.

이슬람 테러 세력에 자금 지원을 해줬다 서방 정보기구의 표적이 됐고, 수십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카다피는 부정 축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독일 DPA통신은 카다피 반대파 지도자들의 말을 인용, 카다피 일가의 자산이 800억~1500억달러라고 설명했다.

# 카다피 무너지기까지...

시민군과 카다피군간의 리비아 내전은 올해 2월15일 시작됐다.

리비아와 동쪽 국경을 접한 이집트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퇴진하는 등 이슬람 국가들에서 민주화 시위가 발생한 영향을 받았다.

초기 시민군은 카다피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시위대에 불과했으나 법무부 장관이던 무스타파 압둘 잘릴 등 거물급 인사가 합류하며 국사 조직화됐다. 잘릴은 시민군 대표기구인 과도국가위원회(NTC)를 조직해 위원장이 됐다. 시민군은 트리폴리에서 동쪽으로 약 1000㎞ 떨어진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시민군이 승기를 잡은 것은 지난 8월 전략적 요충지인 자위야를 장악하면서부터다.

트리폴리에서 서쪽으로 48km 떨어진 자위야는 카다피군의 핵심 보급 관문이자 석유산업의 요충지다.

시민군은 이에 앞서 트리폴리 남쪽의 가리안,동쪽의 미스라타도 확보했다.

수도 트리폴리를 에워싸 보급로를 끊으며 카다피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시민군은 8월말 트리폴리까지 진격해 카다피를 몰아냈고, 카다피는 시르테로 탈출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도 시민군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나토군은 공습 등을 통해 카다피군의 주요 시설을 파괴, 시민군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 재건사업 놓고 강대국 경쟁

카다피가 사망하며 리비아 재건사업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세계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리비아 시민군을 지지하며 군사개입을 주도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는 물론, 리비아를 아프리카 진출 교두보로 삼으려는 중국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리비아의 석유 매장량은 443억배럴(세계 9위)이고 내전이 일어나기 전 하루 생산량은 160만~180만배럴(17위)이었다. 서방 국가들 중 리비아 내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한 나라는 프랑스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국제사회가 리비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주저할 때 카다피군에 대한 공습을 가장 먼저 주장했다.

NTC를 리비아의 합법정부로 인정한 최초 서방국가도 프랑스다.

영국은 8월 자국 내 동결된 리비아 자산을 해제하는 등 NTC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동결 해제된 자산 중 일부인 2억1200만달러를 이미 NTC에 보냈다.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무장관은 “이 돈이 공공부문 노동자에게 월급을 주고 경제에 활기를 넣는데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리비아를 식민지배한 이탈리아도 리비아 재건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는 나토군의 공습이 시작됐을 때 시칠리아섬 공군기지를 제공하며 시민군에 적극 협력했다.

내전 발생 전 리비아 석유 생산의 14%가량을 담당했던 이탈리아 에니는 석유 생산 재개를 위한 기술 지원팀을 리비아에 급파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에니의 지분 30.3%를 소유하고 있다.

서방국가들의 리비아 군사개입을 반대했던 중국과 러시아는 NTC에 뒤늦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중국은 시민군이 트리폴리를 함락하자 NTC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재건 사업에서 중국의 역할을 기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러시아도 NTC와의 협력관계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카다피 정권 당시 합의했던 에너지 개발 프로젝트 등 리비아 현지 사업 이권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로 풀이된다.

가스프롬네프티와 타트네프티 등 러시아 에너지 기업들은 수년간 에너지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이태훈 한국경제신문 기자 bej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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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 예멘 시위 탄력··· "독재자 몰아내자"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사망으로 시리아와 예멘에서 진행 중인 민주화 시위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시리아 반정부 시위의 거점인 홈스에서는 카다피가 사망한 20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를 보냈다.

이들은 11년째 집권 중인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에게 “다음은 당신 차례”라면서 퇴진을 촉구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페이스북 등에 “우리의 혁명은 승리할 것”이라면서 “온 힘을 다해 정권을 붕괴시키고 나서 세상에 시리아 국민은 이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외칠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고 AFP 통신이 전했다.

33년째 장기 집권 중인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예멘 반정부 시위대도 카다피의 사망을 축하했다.

반정부 시위의 거점인 수도 사나 변화의 광장에 텐트를 치고 머물던 시위대는 카다피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텐트에서 나와 춤을 추며 “다음은 살레 차례”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처럼 탄력을 받은 시위대의 힘이 쉽사리 아사드와 살레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우선 리비아와 달리 시리아와 예멘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이 아직 제한적이다.

게다가 아사드와 살레 모두 각각 동생 마헤르와 장남 아흐메드가 이끄는 최정예 공화국수비대가 각 정권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국제사회의 개입이 미약하거나 효과가 없더라도 아사드와 살레 역시 결국에는 국민의 뜻에 따라 카다피를 비롯한 중동의 다른 독재자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영국 IHS중동연구소의 데이비드 하트웰 박사는 “이미 세력이 크게 약화된 예멘의 살레 정권이 시리아 아사드 정권보다 먼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