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39) 영어 알파벳과 경기예측모형
만국 공통어로 통하는 영어가 세상에 그 모습을 처음 나타낸 때는 5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켈트족이 거주하고 있던 브리튼 섬에 침입한 게르만족은 새로운 정착지를 자기 민족의 이름을 따서 잉글랜드로 짓고, 스스로를 앵글로색슨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초기의 영어는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 섬에 정착하면서 전파한 서게르만어의 일종이며, 게르만족들이 사용하던 언어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 영어의 형성에 영향을 준 민족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로마제국이 번성하면서 그들의 영향은 바다 건너 영국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1세기 중엽 로마제국의 종교인 가톨릭이 브리튼 섬에 전파되면서 고대의 영어는 라틴어의 영향도 받게 되었다.

변화 거듭한 영어

중세시대에 이르러 영어는 또 한 번의 변혁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금의 프랑스 북부 해안에 해당하는 노르망디의 윌리엄공이 영국의 왕위에 오르면서 영국에는 노르만 왕조가 세워졌고, 이로 인해 많은 노르만인들이 영국으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

노르만인들은 이주 초기 영국인들과 잦은 충돌을 빚었지만, 이내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그들과 융화되었고 당시 영국사회의 주류계층으로 대두하면서 지배계급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영어가 프랑스어와 노르만어의 영향을 받아 변모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5세기는 영어에 표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친 시기였다.

15세기 이전의 영어는 지역과 사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발음과 어휘, 굴절(어미의 변화)이 제각각이었다.

그러던 중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였던 런던이 도시 기능과 인구면에서 영국 최대의 도시로 발전했고, 이를 계기로 런던에서 사용되는 언어에 맞춰 철자법이 통일되고 어순도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도입된 인쇄술은 런던의 영어를 전국으로 퍼뜨려 명실상부한 표준어로서의 영어를 성립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영어는 대영제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발맞춰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갔다.

식민지가 늘어가면서 영어는 지금의 북미지역과 오세아니아 대륙으로 전파되었고, 아프리카지역에서도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 70여개국에서 영어를 모국어나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 세계 인구의 약 25%에 해당하는 18억명 정도가 영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영어의 위상이 사용 국가와 언어 인구 측면에서 세계 공용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점을 시사한다.

즉, 영어를 일정 수준 이상 구사하면 세계 어느 곳에 있더라도 기본적인 생활은 영위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영어는 범세계적 기구인 유엔의 공용어 중 하나로 채택되어 있다. 따라서 유엔이 주최하는 모든 회의의 내용은 영어로 기록되고 각종 문서도 영어로 작성된다.

이 외에도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고 해석돼야 하는 국제표준이나 각종 기호의 많은 경우가 영어로 표시되고 있다.

W자 닮은 '더블딥'

경제학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예외는 아니다.

특히 많은 경제학자들이 경제상황의 변화 추이를 나타내는 경기곡선을 설명할 때 영어의 알파벳에 빗대곤 한다.

최근의 경제상황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더블딥(Double dip)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더블딥이란 경제가 침체기를 두 차례 겪은 후 본격적인 회복세에 접어드는 것으로, 이러한 경기의 변화 모양이 알파벳 ‘W’자를 닮았다고 하여 ‘W자형 경기곡선’이라고도 부른다.

더블딥은 일반적으로 2분기 연속으로 침체되던 경기가 잠시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다시 2분기 연속 침체하는 경우를 뜻한다.

더블딥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미국의 투자금융회사인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의 아시아지역 회장인 스티븐 로치(Stephen S. Roach)로 알려져 있다.

그에 따르면 더블딥은 현재까지 미국경제에서 여섯 번 나타났으며, 그 첫 번째는 대공황 시기라고 한다.

대공황은 1929년 증시 하락으로 은행들의 줄도산 사태가 일어나면서 발생했다.

대공황 초기 미국 정부는 정부지출을 늘리고 통화공급을 확대함으로써 경기를 어느 정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의 가능성을 우려한 나머지 확장정책을 긴축 일변도로 전환하면서 경기는 다시 침체에 빠져들었고, 경기불황의 여파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W자형’이 두 번의 경기침체를 겪는 것에 비하여 ‘V자형’은 경기가 침체 후 곧바로 회복되는 경우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극복한 과정이 ‘V자형 경기곡선’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1997년 아시아의 금융위기 당시 우리나라는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인한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을 막기 위하여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였다.

또한 이에 대한 대가로 대규모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단행되면서 국내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고 대규모 실직 사태가 발생하여 경기는 깊은 하락의 늪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정부의 긴축정책과 더불어 강력한 구조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위기 극복의 전기가 마련되었고, 여기에 국민들의 자발적인 희생과 고통분담이 더해지면서 IMF의 차입금을 조기에 상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우리나라 경제는 한 번의 침체와 곧 이은 반등을 보이는 ‘V자형 경기곡선’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알파벳으로 빗댄 경제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일본경제의 장기침체는 알파벳 ‘L’자에 비유되곤 한다.

1990년 이전까지 평균 경제성장률 5%대를 유지해오던 일본경제는 부동산 가격과 주식시장의 버블이 꺼지면서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는 위기 상황을 맞이하였다.

여기에 엔화의 평가절상으로 기업들이 불황에 빠지면서 일본경제는 2002년까지 10여년에 걸쳐 0%대의 낮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일본의 상황과 같이 경기 저점의 상태가 상당기간 지속되는 장기불황에 빠진 경제를 일컬어 ‘L자형 경기곡선’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U자형 경기곡선’은 경기가 상승국면에 진입하기까지 ‘V자형’에 비해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경기예측모형이다.

즉, ‘U자형’은 경기가 저점에 머무르는 시간이 ‘V자형’보다 길고 경기회복 속도도 완만한 경우를 말한다.

경제상황을 영어의 알파벳에 빗대어 설명하는 경우는 이 밖에도 많다. 급격한 침체와 회복을 보이는 경기는 공이 바닥에 떨어진 후 다시 튀어 오르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N자형 경기곡선’이라고 한다.

한편 경기상황을 나타내는 용어는 아니지만 경기 하강으로 디플레이션(Deflation)이 우려되는 경우를 가리켜 ‘D의 공포’라고 한다.

또한 ‘R의 공포’는 경기침체(Recession)가, ‘J의 공포’는 경기침체로 대규모의 실직사태(Jobless)가 우려될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다.

정원식 KDI 전문연구원 kyonggi96@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