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대한민국 먹거리 찾아나선 '반도체의 神'

10년 뒤 먹거리 찾아나선 황창규
황창규 지식경제부 연구·개발(R&D) 전략기획단장(58)은 ‘반도체의 신(神)’으로 불린다. 지금은 10년 뒤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정부 산하 R&D 조직에 몸담고 있지만 이전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의 주역이자 상징이었다.

2009년 1월 인사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오로지 반도체 외길을 걸어 왔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삼성전자와 대한민국의 반도체 역사가 가능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을 먹여살릴 기술과 비전을 장기적인 시각에서 찾겠다”고 다짐했다.

#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

황 단장과 반도체의 인연은 서울대 전기공학과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과 도서관을 오가는 대학생 황군은 3학년 때인 1975년 인생의 목표를 정해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인텔의 창업자 앤디 그로브가 쓴 반도체 이론서(Physics of Semiconductor Device)였다.

반도체가 오늘날처럼 산업의 쌀로 자리잡기 훨씬 전에 그는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눈이 떠졌다고 한다.

반도체에 후기 산업사회의 미래가 있다고 직감한 그는 반도체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 공부 또 공부- 유학의 길

그의 꿈은 1977년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윌리엄 쇼클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계획으로 바뀌었다. 반도체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그는 1981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85년 매사추세츠주립대에서 공학박사를 딴 그는 모두가 선망하는 IBM과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의 스카우트 제의를 뒤로 하고 스탠퍼드대 연구원으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나중에 “스탠퍼드의 연구 분위기 못지않게 학교 근처에 실리콘밸리가 있어 실질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그는 많은 논문을 발표해 교수진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반도체 업체인 인텔에 자문을 해주면서 인텔의 기술력을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하지만 그가 선망한 대상은 일본이었다.1980년대 일본의 NEC와 히타치의 반도체 기술은 한국이 감히 흉내낼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 귀국 '일본을 넘어서야 한다'

1989년 그는 4년6개월의 스탠퍼드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2년 뒤인 1991년 드디어 256메가 D램 개발책임을 맡았다.

거듭되는 실패와 절망에 가까운 기술적 한계에 부닥친 개발팀은 1994년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 개발에 성공했다. “한국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얕잡아 본 일본은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그는 쾌속 승진했다. 성과에 대해선 반드시 보상하는 것이 삼성전자 사풍이다.

1994년 상무, 1998년 전무, 1999년 부사장을 거쳐 2000년 대표이사겸 메모리 사업부장이 됐다.

그리고 2004년 마침내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이 됐다.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의 중심에 그가 있었던 것이다.

# 앤드 그로브상 수상

2006년 그는 앤디 그로브상을 받았다.

이 상은 인텔의 창업자인 앤디 그로브가 2000년 제정한 것으로 세계 반도체 기술발전에 기여한 학자와 기업인에게 주는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

그는 기업인으로는 두 번째, 동양인으로는 첫번째로 수상했다.

2002년 ‘황의 법칙’을 발표, 매년 획기적인D램과 낸드플래시를 내놓는 등 시장을 선도한 점을 인정받았다.

당시 삼성전자는 50나노(1나노=10억분의 1m) 16기가비트 낸드플래시를 개발한 데 이어 40나노 32기가비트 낸드플래시를 개발하는 등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었다.

참고로 50나노는 머리카락 두께 2000분의 1에 해당하는 굵기이며 16기가는 손톱만한 칩안에 164억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용량을 말한다.

# 음악 미술에도 조예

황 단장은 책벌레만은 아니다. 그는 음악과 미술 서예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고 시절 그는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노래실력을 갈고 닦았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대학시절 국립극장 입장권을 사기 위해 차비를 아낀 적도 있다.

미술과 서예는 가족적 DNA를 물려 받은 것같다. 그는 구한말 사군자 중 매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황매산 선생의 친손자다. 운동도 잘해서 테니스와 골프 실력이 게임에서 여간해서는 잘 지지 않을 정도다.

# 융복합 개방형 혁신이 미래좌우

그는 요즘 R&D단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한국은 재빠르게 추격만 하면 됐지만 앞으로는 선발주자가 돼 추격자들을 따돌려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융복합 기술이 미래의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자기 역량과 다른 사람의 역량을 합치는 개방형 혁신이 중요하다는 것.

이런 기술이 등장하기 위해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그는 잊지 않는다.

멀리 내다 보고 R&D 투자를 늘릴 때만이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늘 안주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배고픈 채로 바보같이 살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의 말을 좋아한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기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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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반도체 집적도 2배 증가

황의 법칙이란

황창규 단장을 말할 때 꼭 따라다니는 말이 ‘황의 법칙’이다. 황 단장은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2002년 국제반도체 학술회의에서 “반도체 집적도는 매년 두 배씩 증가한다”고 발표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성을 딴 ‘황의 법칙’이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황의 법칙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이전에 반도체 시장에 적용됐던 무어의 법칙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미국 인텔사의 창업자인 고든 무어(Gordon Moore)는 일찍이 반도체 집적도는 1년6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고 공언했다.

무어보다 집적도 성장속도를 6개월 단축시켰다는 점에 세계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기술력은 황의 법칙을 매년 증명했다.1999년 256메가 낸드플래시메모리가 개발된 이후 2000년 512메가, 2001년 1기가, 2002년 2기가, 2003년 4기가, 2004년 8기가, 2005년 16기가, 2006년 32기가,2007년 64기가 등 해마다 두 배씩 반도체 집적도가 증가한 칩을 선보였다.

황의 법칙이 지켜지려면 반도체 메모리 소자의 크기를 지속적으로 줄이는 기술력이 관건이다.

황 사장은 당시 삼성전자의 기술력을 알고 있었다. 황의 법칙은 결국 반도체 기술진보의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지고 관련 산업과 시장도 그에 따라 격변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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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규 단장 프로필

▶1953년 부산 출생

▶1976 서울대 전기공학과 졸업

▶1985년 미국 스탠퍼드대 책임연구원

▶1989년 삼성전자 입사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

▶2006년 앤디 그로브상 수상

▶2010년 지경부 전략기획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