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훼손된 법치주의...법으로 정한 정리해고도 못하나
정리해고 근로자를 재고용하라는 국회 권고안을 수용해 논란이 일고 있다.

노사 당사자나 공적 조정기구인 노사정위원회를 모두 배제한 채 정치권이 직접 개입하고 중재했기 때문이다.

민간기업의 노사관계가 노사자율이라는 원칙이 아닌 제3자의 개입과 정치적 논리로 결정되면서 노사관계의 나쁜 선례(先例)로 남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 정치권으로 번진 노사문제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은 ‘정리해고자 94명을 1년 내 재고용하고,이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2000만원 내에서 생계비를 지원한다’는 내용의 국회 환경노동위 권고안을 지난 7일 수용했다.

10여개월간 갈등을 겪어 온 한진중공업 노사분규가 가까스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지만 향후 기업들의 자율적인 구조조정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경영상 이유로 적법한 절차에 의해 단행한 정리해고가 정치권의 개입으로 취소돼서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사측이 2010년 12월 경영악화를 이유로 생산직 근로자들을 대규모 정리해고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으면서 촉발됐다.

노조 측은 정리해고 철회 등을 외치며 즉각 총파업에 들어갔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1월6일부터 9개월째 크레인 위에서 시위 중이고 사태의 해결을 촉구하는 희망버스 시위도 4차례 있었다.

지난 6월27일 노사 합의가 도출되면서 해결의 기미를 찾는 듯했지만 정리해고자들의 잇단 항의집회와 희망버스 행사 등으로 합의가 무용지물이 됐다.

사태가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자 정치권은 앞다퉈 이를 정치 쟁점화하며 여론몰이에 나섰다.

한 기업의 노사문제가 정치 이슈로 변질된 것이다.

경총 관계자는 “일부 정치권은 노동위원회와 사법부가 정당성을 인정한 ‘긴박한 이유에 의한 정리해고’를 부당한 해고로 취급해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며 “그 결과 한진중공업은 부득이하게 권고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된다”고 전했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치권이 갈등 현안에 대해 합의안을 마련한 것은 좋지만 정리해고자 재고용 권고안은 법원에서조차 정당하다고 판결한 것을 뒤집는 것으로 법치주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 텅빈 도크 외면한 권고안

국회에서 내놓은 권고안은 한진중공업의 경영현실을 반영하지 않아 뒷감당이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부산 영도조선소를 정상 가동할 수 있는 일감 확보가 쉽지 않은데 정리해고 근로자들을 재취업시키면 경영부실이 더 심해질 수 있어서다.

영도조선소의 ‘태생적 한계’로 어려움을 겪던 이 회사는 2008년 리먼사태 이후 세계 조선 불황까지 겹치면서 그해 12월부터 지난달까지 수주가 전무했다.

영도조선소 부지는 26만4462㎡ 정도로 830만㎡의 부지를 갖고 있는 현대중공업 등과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도크 길이는 300m에 불과해 최대 8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규모의 컨테이너 선박밖에 지을 수 없다.

2007년 필리핀 수비크에 조선소를 건설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현재 직장 폐쇄 상태에 있는 이 회사는 해외에서 구두로 4척의 선박 건설을 의뢰받은 상황이다.

노사분규에 대한 발주처의 우려 등으로 정식 서류계약은 안돼 있다.

업계에서는 한진중공업이 1년 안에 충분한 수주물량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으로 보고있다.

한국기업평가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진중공업이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빅3 조선업체와 중견조선사들의 틈에 끼여 내년에도 부침이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경총은 “한진중공업처럼 심각한 경영위기에 봉착한 기업마저 정치권 개입에 의해 고용 조정을 포기하면 기업 생존뿐 아니라 다수 근로자의 생계도 위태로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 CEO 리스크도 한 몫

한진중공업 문제가 커진데는 경영진의 책임도 크다. 지난 6월 희망버스가 등장한 이후 조 회장은 돌연 출국길에 올랐다.

그의 출국 날짜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정리 해고 장기 파업 사태에 대한 질의를 위해 출석을 요청한 날로,이 때문에 ‘국회 출석을 피하기 위한 기획 출국이 아니냐’는 비난이 나왔다.

국내 노동자들을 정리 해고한 직후 174억원을 주주 배당하자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에 대한 논란도 일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조 회장이 지난 8월10일 귀국해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지만 해외체류 등에 대한 석연치 않은 해명으로 신뢰를 얻지 못했다.

게다가 상당한 기간 동안 출장중이 아닌 국내에 체류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처음부터 갈등을 외면하려 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치권의 개입으로 법과 원칙이 훼손되는 나쁜 선례”라면서도 “기업들도 투명한 인사관리를 위해 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오너 경영인들이 의연하게 대처해야 하는데도 해외로 도피하는 등 죄인처럼 행동한 것이 사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일각에선 이번 권고안이 1998년 2월 노·사·정 합의에 따라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을 때 정리해고를 할 수 있도록 한 노동법을 사문화시키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법적으로 허용된 정리해고를 부당해고로 정치화하려는 시도가 늘어나,향후 정리해고 문제가 불거질 때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킬 가능성도 크다.

이유정 한국경제신문 기자 y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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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취업자 지위·재취업 기한 놓고 '티격 태격'

국회 권고안 쟁점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내놓은 권고안은 ‘퇴직 노동자 94명에 대해 1년 이내 재고용을 약속하고,이 기간 동안 2000만원 한도의 생계비를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사측이 권고안을 수용했지만 노사협상이 타결되기 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권고안 내용을 놓고 양측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쟁점은 재취업자의 지위와 재취업 기한에 대한 해석이다.노조 측은 “국회 권고안에서 제시한 1년은 해고자들이 해고된 2010년 2월14일을 기준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 기준대로라면 한진중공업은 해고자들은 앞으로 4개월 안에 전부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사측에서는 권고안이 만들어진 날로부터 1년 이내로 풀이한다.재고용 시점에 대해 노사 의견이 8개월 가까이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사측은 “1년 이내 재고용도 회사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내용을 수용한 것인데 4개월 안에 재고용하라는 것은 비상식적이다”고 말했다.

재고용에 대한 양측의 해석도 제각각이다.사측은 재고용에 대해 정리해고 후 재취업하는 형태로 해석하는 반면 노조는 근속연수 등을 승계한 복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회사 측은 “해고자들에게 이미 퇴직금을 다 줬기 때문에 재고용이라는 것은 다시 신입으로 재취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노조 측은 “해고 노동자 대부분이 30~40년 이상 근속을 했는데 신입으로 재고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정리해고를 원천 부정한 복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노조 측은 협상에서 사측에게 손해배상과 임단협 문제 등의 양보를 요구할 방침으로 알려졌다.사측은 권고안을 수용하면서 이미 많은 부분을 내줬기 때문에 노조의 주장을 더 들어주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