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 - 조지 소로스
[세기의 라이벌] 가치 투자 vs 동물적 승부 … 자본시장 꿰뚫은  ‘눈’ 달랐다
“Buy American,I am.(미국 주식을 사라,나는 이미 사고 있다. )”

2008년 미국 정부가 700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지원안을 추진하고 있을 무렵, 워런 버핏이 한 말이다.

이 한마디는 좌초 위기에 있던 미국 증권시장에 생명줄 역할을 했다.

실제 그는 골드만삭스와 BOA메릴린치에 수십억달러를 투자했고, 미국 제조업의 상징인 제너럴일렉트릭(GE)에도 3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인상 좋은 이웃집 아저씨 풍의 버핏이 ‘팍스 아메리카’의 구원자로 나서고 있을 때,조지 소로스는 특유의 냉혹함으로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버락 오바마 정부의 구제금융을 맹렬히 비난하며 시장 스스로 부실을 털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2008년의 위기는 더 큰 위기의 전주곡일 뿐이고, 최소 3년에서 5년간 위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그의 진단에 대중들은 경악했다.

버핏과 소로스는 같은 해,같은 달에 태어났다.

1930년 8월12일 소로스가 18일 앞서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80여년을 살면서 둘은 늘 엇갈렸다.

한 쪽은 가치 투자의 대가로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칭송을 얻었지만 다른 한 쪽에는 위기를 부르는 냉혹한 투기꾼이라는 혹평이 가해졌다.

흥미롭게도 두 금융업계의 거두는 단 한번도 부딪치지 않았다.

유일한 기회는 1956년 소로스가 월가에 입성할 무렵이었는데 월가에 있던 버핏은 몇 달 앞서 오마하로 내려갔다.

평행선을 걷듯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그들은 금융시장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각각 벅셔해서웨이(버핏)와 퀀텀펀드(소로스)를 통해 수십년간 연평균 20%가 넘는 수익률을 기록한 투자의 달인이자 스스로가 세계 최고 갑부의 반열에 올랐다.

버핏과 소로스는 전업 투자자다.

버핏은 ‘스노볼(복리)의 마법’을 누구보다 잘 실천에 옮겼다. 비법은 장기 투자였다.

반면 소로스는 글로벌 자본 시장의 맹점을 파고들어 기회를 만들고,위기를 활용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들의 수익률은 경이적이다.

버핏은 최근 벅셔해서웨이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1965년 이래 45년간 연평균 20.3%의 수익률(주당 자산가치 기준)을 달성했다고 밝혔다.

현재 벅셔해서웨이 주식의 주당 순자산가치(BPS)는 1억원에 육박한다.

삼성전자의 BPS가 35만원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다.

소로스가 짐 로저스와 함께 만든 퀀텀펀드는 약 280억달러(31조원)를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펀드는 외환상품 관련 각종 금융 파생상품에 투자해 1973년 설립 이래 연간 평균 9억달러(1조원) 정도를 벌어들인다.

매년 1조원가량을 벌지만 직원은 고작 300명가량이다. 투자 지주회사인 벅셔해서웨이 직원 25만명이 지난해 218억달러(24조원)를 벌었으니 종업원 1인당 수익 면에서는 소로스가 월등히 앞서는 셈이다.

둘 다 투자의 전설을 쓰고 있지만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소로스에겐 ‘투기자’라는 오명이 늘 따라다닌다.

한국의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소로스는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1997년 8월 싱가포르 역외선물환 시장에서 원화를 대량 매도해 원화가치 폭락을 부추겼다.

소로스와 일했던 펀드매니저들은 그를 ‘세계의 모든 돈과 신용의 흐름을 시각화할 수 있는 신비에 가까운 능력의 소유자’로 묘사한다.

이런 탁월한 감각을 활용해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맹점을 교묘히 파고들었다.

소로스는 차익거래의 대가였다.

동일한 상품을 파는 두 개 이상의 시장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방법을 알아냈다.

소로스는 자신의 투자 스타일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일은 분석이나 예측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정한 순간이 오면 기꺼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배짱 같은 것이다. ”

반면 버핏의 투자 방식은 단선적이면서도 장기적이다. “20년간 보유할 가치가 없는 주식은 단 10분도 쳐다보지 말라”는 버핏의 원칙을 두고 투기라는 꼬리표를 붙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성장 가능성 있는 기업을 인수하거나 직접 경영해 두고두고 수익을 향유하는 게 버핏의 스타일이다.

이와 달리 소로스는 제때 가장 영양가가 있는 부분만을 잽싸게 빼먹고 나면 그만이다.

약탈자의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전문가들은 버핏과 소로스의 상이한 투자 스타일이 어린 시절의 경험과 무관치 않다고 평가한다. 헝가리 유대인 중산층의 차남으로 태어난 소로스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희생양이 될 뻔했다. 옛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서도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는 살기 위해 돈을 벌었다.

15세가 되던 해 소로스는 하룻밤 사이에 화폐가치가 3분의 1로 떨어지고,미국 돈 1달러만 있으면 한 식구가 1주일 내내 먹고 사는 현상을 목격했다.

그는 당시 “인플레이션과 환 차이를 목격하고 그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17세에 런던으로 탈출한 소로스는 싸구려 하숙집을 전전하며 접시닦기,웨이터,페인트공,인명구조대원 등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사춘기 소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생이었다.

누구보다도 기민하게 움직여야 생존할 수 있었던 인생 역정이 투자 방식에도 그대로 스며들었다.

버핏은 부유한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투자 자체를 즐겼다. 로즈힐 초등학교 시절에 경마지를 직접 만들어 팔았고,고교 시절엔 폐차 직전의 롤스로이스를 구입해 대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950년대 말 그의 자산은 이미 1만달러에 육박했다. 돈을 왜 버느냐는 질문에 버핏은 “완전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버핏과 소로스는 돈을 쓰는 일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쟁을 벌였다.

약 450억달러(52조원)의 재산을 가진 버핏은 2006년 빌&멜린다 재단에 수십억달러를 출연했고,향후 전 재산의 99%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언했다.

소로스도 재단을 설립해 제3세계 민주화 등을 위해 2006년까지 총 23억달러의 재산을 쏟아부었다.

대부분의 재산을 1984년 5월 조국인 헝가리를 시작으로 공산 치하에 있던 동유럽 민주화를 위해 바쳤다.

헝가리에는 복사기를 보급했고, 러시아에는 지방대학에 1억달러를 들여서 인터넷 망을 연결해주기도 했다.

전형적 미국인인 버핏과 달리 소로스의 관심은 늘 미국 바깥을 맴돌았다.

돈을 버는 것 못지않게 쓰는 방식에서도 차이점을 보였던 셈이다. 흥미롭게도 소로스는 거부(巨富)들의 자선에 냉소를 보내곤 했다. “기부금 신탁이란 매우 흥미로운 세금 포탈 장치다.

자산을 신탁에 위탁하고 매년 일정액의 금액을 특정 단체에 기부하는데 정해진 일정 기간 돈을 기부하고 남아 있는 원금은 상속세나 증여세 없이 상속인에게 전해진다. ”

그의 솔직한 고백이 버핏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이렇게 또 엇갈렸다.

실제 버핏식의 기부가 항상 환영만 받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 거부인 스테판 로스는 “차라리 세금을 내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갑부들이 어차피 낼 세금을 가지고 ‘선한 부자’라는 명성까지 얻고 있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독일의 거부 페터 크래머도 “부자들이 막대한 세금을 내지 않고 자선단체에 기부할 경우 그 돈을 어떻게 쓸지 정부가 아닌 극소수의 부자들이 결정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버핏과 소로스,금융 투자업계의 전설이자 영원한 맞수인 이 둘에게 과연 선악의 이분법을 적용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스스로의 투자 원칙을 만들고 이를 성공적으로 실천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투자를 통해 돈을 벌어들이는 것에 일종의 ‘원죄 의식’을 가졌다.

이를 ‘속죄’하는 방법으로 버핏은 기부를,소로스는 제3세계 민주화 지원이라는 길을 택했다.

박동휘 한국경제신문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