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점심은 없다” vs “자율조정 못 기다려”
[세기의 라이벌] (2) 밀턴 프리드먼 vs 폴 새뮤얼슨
세계 경제학계가 ‘정부의 시장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시안(케인스학파)들에 점령당했던 1962년. 미국 시카고대에 웅크려 있던 자유주의 경제학계의 대표선수가 바뀐다.

거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1899년생)가 오랜 연구생활을 접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로 떠났던 그해. 바통을 넘겨받은 밀턴 프리드먼(1912년생)은 ‘자본주의와 자유’라는 명저를 출간한다.

프리드먼의 등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불꽃처럼 타오르던 세계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물가 상승 속 경기 침체)이라는 전대미문의 불황에 빠지고,정부 재정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해 파산하던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그의 경제철학은 ‘신자유주의’로 불리며 경제학계의 새 주류로 부활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년생)에게 패해 경제학을 접고 철학과 법률,도덕에 심취해 있던 하이에크에게 노벨경제학상(1974년)을 안긴 것도 그였다.

프리드먼 자신도 2년 뒤인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는다.

프리드먼에 맞선 인물은 폴 새뮤얼슨(1915년생)이었다. 그는 어려운 이론을 쉽게 설명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케인스의 경제학은 그의 손에서 정교하게 가다듬어졌다.

프리드먼의 자유주의 철학에 맞서 재정정책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역설했다.

#새뮤얼슨의 시대

두 학자는 1932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처음 만났다. 시카고대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본고장이었다.

프리드먼은 대학원생이었고 새뮤얼슨은 대학 신입생이었다. 당시는 대공황이 한창인 때였다.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케인스학파가 새롭게 등장했다.

새뮤얼슨은 케인스의 이론에 매료됐다. 시카고대를 졸업한 뒤 곧바로 하버드로 옮겼다.

그는 시장의 자유를 신봉하는 시카고대의 학풍을 ‘정신분열증적’이라고 표현했다.

“시카고대를 다니면서 교실에서 배웠던 것과 창문 밖 길거리에서 듣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됐다”는 말도 했다.

새뮤얼슨이 펼친 이론은 ‘완전고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공공지출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

그는 확대 재정정책이 승수효과를 일으켜 국민소득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새뮤얼슨은 정교한 재정정책으로 경제를 미세조정하면 낮은 인플레이션율 아래에서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새뮤얼슨은 ‘현대 경제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경제학(Economics)’을 1948년 발간했다.

그의 책은 케인스 이론을 쉽고 명료하게 설명했다.

경제학에 엄정한 수학적 방법론을 적용한 것이다.

그의 책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전 세계 27개 언어로 번역됐다. 미국에서만 19쇄까지 출판돼 400만권 넘게 팔렸다.

경제학원론 교과서로는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새뮤얼슨은 1970년 미국인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명강의와 겸손한 자세로도 유명했다.

#프리드먼의 반격

정부의 시장개입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에서 프리드먼은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그는 ‘정부의 실패 가능성’에 주목했다.

프리드먼은 케인스 이론을 깨뜨리기 위해 ‘케인스 승수’를 걸고넘어졌다.

승수이론은 예컨대 정부지출이 증가하면 그 돈이 국민소득으로 들어가고,소비가 늘어나는 식으로 계속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정부의 재정 지출에 필요한 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정부가 세금을 인상하면 시중 자금이 줄어들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통화량이 줄면 금리가 올라 민간투자와 소비가 그만큼 위축된다는 것이다.

민간부문을 시장에서 쫓아낸다는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다.

정부지출 효과는 이 같은 구축효과 때문에 상쇄돼 경제활성화 효과가 없거나 미미하다는 이론이다.

프리드먼은 케인스학파가 말하는 ‘유효수요 부족’에서 오는 경기 침체나 인플레이션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공짜 점심은 없다” “사하라 사막을 관리하는 업무를 정부에 맡겨봐라.

아마도 5년 안에 모래가 바닥날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의회를 거치지 않고 국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다”

“임시로 정부 프로그램을 운용한다는 말을 믿지 마라” 등의 명언을 남겼다.

밀턴 프리드먼과 폴 새뮤얼슨은 평생의 라이벌이면서 둘도 없는 친구였다.

왼쪽부터 제임스 토빈(1918~2002), 프리드먼(1912~2006), 프랑코 모딜리아니(1918~2003), 새뮤얼슨(1915~2009). 네 명 모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신자유주의의 득세

프리드먼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을 통해 경기를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을 늘리면 화폐 보유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거래에 필요한 돈만 갖고 나머지는 상품 및 서비스에 그 돈을 지출할 것이기 때문에 경제활동이 활발해진다고 설명했다.

재정 지출을 늘리지 않고도 통화정책으로 경기 조절을 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프리드먼은 케인스학파가 주름잡고 있던 1950~1960년대에 이 학설을 발전시켰다.

1956년 발간한 ‘화폐수량설 연구’가 대표적인 저서다. 하지만 당시는 케인스학파의 시대였다.

통화에 주목하는 것은 바보로 여겨졌다. 1970년대 들어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뒤바뀌었다.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율이 모두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2차 세계대전과 이후 경제 재건 과정에서 막대한 재정을 소모한 정부는 재정을 추가로 투입하기가 어려웠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렸던 영국은 1940년대 후반부터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통칭되는 사회복지 국가를 지향했다가 1970년대 후반 사실상 국가부도가 났다.

영국은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다.

프리드먼에게는 자신의 분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시기였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학계의 우등생으로 올라섰다. 미국에선 닉슨,레이건 등 공화당 정부가 통화주의와 신자유주의 이론을 토대로 경제정책을 수립했다.

프리드먼은 ‘자유경쟁체제의 굳건한 옹호자’‘작은 정부론의 기수’라는 애칭이 붙었다.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는 “프리드먼은 자유 경제학이 거의 잊혀졌을 때 이를 부활시킨 지적 자유의 투사”라고 지칭했다.

#새뮤얼슨의 재반격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었던 폴 볼커가 고금리 정책으로 인플레이션과 싸움을 벌이던 1982년.

화폐의 유통 속도가 갑자기 5%나 곤두박질쳤다.

1988년까지 화폐 유통 속도는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1948년부터 1981년까지 3~4% 정도로 꾸준하게 성장했던 화폐 유통 속도가 크게 흔들리면서 새뮤얼슨에게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새뮤얼슨은 통화량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 자체가 현실세계에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준칙주의를 적용해 통화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프리드먼의 통화 이론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돈을 푸는 행위가 시장에서 효과를 나타낼 때까지 상당한 시차가 있고,여러 가지 다른 변수들이 화폐 유통속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효과적인 통화정책을 펴기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프리드먼과 새뮤얼슨으로 각각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과 ‘케인시안 경제학’의 싸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들이 엄청난 재정적자로 ‘글로벌 재정위기’가 터진 요즘 정부의 실패를 예견했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선 ‘시장경제의 자율 조정 기능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며 재정지출 확대를 요구하는 정치권과 정부의 지원을 받는 케인시안 경제학도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경기 변동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들의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김일규 한국경제신문 기자 black0419@hankyung.com


<밀턴 프리드먼>

△1912년 뉴욕 브루클린 출생
△1933년 시카고대 석사,1946년 컬럼비아대 박사
△1947~1976년 시카고대 교수
△1967년 전미경제학회장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200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심장병으로 별세


<폴 새뮤얼슨>

△1915년 미국 인디애나주 출생
△1932년 16세에 시카고대 입학,1941년 하버드대 박사
△1940년 25세에 MIT 경제학과 교수 발탁
△197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1996년 미 국가과학상 수상
△2009년 매사추세츠주 버몬트 자택에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