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Issue] 카다피 쫓아냈지만...리비아 정국 안정 '가시밭길'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42년 철권통치가 막을 내렸다.

올 1월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 민주화 운동 '재스민 혁명'은 예멘,이집트,시리아 등 주변국으로 번졌으며 그 결과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는 30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혁명의 불길은 리비아로 이어졌고 6개월 만에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켰다.

예멘,시리아의 지도자인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과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도 퇴진 압박을 받고 있다.

문제는 그 이후다.

국가과도위원회(NTC)가 시민군을 이끌고 있지만 수백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국가 특성상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카다피 독재 종식 후 혼란은 이제부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리비아 재건을 놓고 세계 각국의 셈법도 각양각색이다.

프랑스 영국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리비아 공습을 주도했던 국가들은 권력 재편에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면 신중한 입장을 취해왔던 미국은 세계 경찰국가의 위상을 보여줄지 미지수다.

NATO 공습에 반대했던 중국과 러시아는 뒤늦게 관계 개선에 급급한 모습이다.

주요국 간 실질적 이해관계인 리비아의 석유 개발권 및 도시 개발 프로젝트를 놓고 한국 정부도 경쟁에 뛰어들 전망이다.

리비아를 42년간 지배해온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이후의 리비아에 대해 우려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카다피를 몰아내기 위해 하나로 뭉친 시민군의 NTC가 정파와 부족 간 싸움이라는 또다른 내전의 씨앗을 안고 있는 것이다.

카다피 이후 리비아를 이끌 인물로는 무스타파 압델 잘릴 NTC 위원장이 가장 유력하다.

NTC는 시민군 대표기구로 미국,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로부터 합법적 정부로 인정받았다.

그는 카다피 체제 아래에서 2007년부터 법무장관을 지냈으나 지난 2월 비무장 시위대를 향한 실탄 사격에 항의,정부 각료로는 처음으로 사임했다.

하지만 리비아의 부족 수가 500개가 넘기 때문에 이들의 주도권 다툼을 벌일 경우 NTC는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시민군의 주축세력인 와르팔라족은 리비아 인구(642만명)의 16%를 차지하는데 이들이 카다피에 협조했던 카다파족에 보복을 가해 새로운 내전이 발생할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라크가 후세인 퇴진 이후에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눠져 갈등을 겪는 것과 비슷한 양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시민군 중 일부는 NTC를 합법적 정부라 부르는 것에 반대할 정도로 내부 불만이 크고 구심력이 약하다고 전했다.

최근 리비아 서부 산악지대와 해안도시 미스라타 일대에서는 시민군이 지역 주민들을 친카다피 성향이란 이유로 약탈 ·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말 시민군 최고사령관인 압둘 파타 유네스 대장이 내부 세력에 의해 피살된 것도 시민군 내 분열상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미국과 프랑스는 최근 유엔의 제재결의에 따라 동결한 리비아 정부의 해외자산 중 각각 35억달러와 2억5900만달러를 임시정부에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돈이 전해질 경우 자금 운용을 둘러싸고 갈등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안정을 찾을 때까지 유엔이 리비아를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세계 각국은 '포스트 카다피' 체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2월 리비아 내전이 발발한 직후부터 NATO군의 개입을 주장했던 프랑스는 NTC를 리비아의 합법정부로 제일 먼저 인정한 국가다.

외신들은 트리폴리 함락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NATO군 공습을 프랑스가 주도했듯이 정권 재수립 과정에서도 프랑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달에야 NTC를 공식 인정한 영국은 상대적으로 처져 있다.

미국은 신중한 입장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 다시 중동 사태에 개입하기가 부담스럽고 재정긴축 등 경제 이슈가 시급한 탓이다.

따라서 미국은 헌법제정과 민주선거 등 권력이양 과정에서 NTC를 측면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하다.

반면 NATO군 공습에 반대했던 중국과 러시아는 시민군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시민군 지지로 입장을 바꿨다.

리비아 재건에 따른 사업권을 따내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질 전망이다.

원유 산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NTC가 기존 계약을 존중할 것이라고 밝혀 내전 이전부터 진출했던 프랑스,이탈리아 석유업체들이 한 발 앞서 있는 상태다.

반면 시민군 측 석유회사인 아고코(Agoco) 대변인이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과는 정치적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언급하자 해당 국가는 비상이 걸렸다. 다만 정유시설이 정상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리비아 재건을 위해 약 1200억달러 규모의 전후복구 프로젝트 시장이 열릴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한국 기업은 400억달러 규모의 사업권을 따낼 가능성이 있다고 KOTRA는 분석했다.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한국은 리비아 건설 프로젝트의 3분의 1 정도를 수주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는 올 상반기 한국 기업의 대(對) 리비아 수출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87.9% 감소한 1억1900만달러에 그쳤지만 내년부터 매출이 큰 폭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정성택 한국경제신문 기자 naive@hankyung.com

---------------------------------------------------------

27세에 정권장악...아프리카 '왕중의 왕' 자처

>>카다피는 누구인가?


[Global Issue] 카다피 쫓아냈지만...리비아 정국 안정 '가시밭길'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1942년 6월7일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3년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열렬한 이슬람교도이자 아랍 민족주의자였다.

당시 리비아는 이드리스 1세가 지배하는 왕정국가였다.

카다피는 이드리스 1세의 통치에 불만이 많았다.

왕정과 결탁해 헐값에 석유개발권을 따내는 일이 빈번했고 국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1965년 리비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카다피는 1969년 9월1일 27세 나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집권 초 카다피는 교육 및 의료 혜택을 늘리는 민중을 위한 정책을 폈다.

석유를 판 돈으로 대형 수로를 건설하는 등 기간산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는 아랍권 젊은이들 사이에서 '아프리카의 체게바라'로 불렸다.

국가원수에 오른 뒤에도 대통령 직책을 거부,대신 쿠데타 당시 대위였던 자신의 계급을 대령으로 진급시켰다.

현재 카다피의 정식 직책은 대령이다.

카다피는 1977년 리비아를 공화국 체제에서 '자마히리야(민중에 의한 정부)' 체제로 바꿨다.

자마히리야는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결합한 리비아식 직접 민주주의로 카다피가 만든 신조어다.

카다피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도 없애버렸다.

현재 정식 국명은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카다피는 독재자로 변해갔다.

혁명 핵심동지이자 총리인 압둘 잘루드 등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은 숙청했다.

부정축재도 일삼았다.

독일 DPA통신은 카다피 반대파 지도자들의 말을 인용,카다피 일가의 자산이 800억~1500억달러(86조~162조원)에 이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