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이광수의 '흙'과 변호사 공급 규제
춘원(春園) 이광수(1892~1950)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1917)을 쓴 소설가이다.

이광수의 작품들은 신소설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한국 근대문학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광수는 <무정>과 같은 해에 <개척자>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는데,<개척자> 역시 소설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소설 중 최초로 변호사가 등장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광수는 1924년부터 1925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재생>에서도 윤 변호사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1932년 발표한 <흙>에서는 변호사가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흙>의 주인공 허숭(許崇)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인물이다.

고등문관시험, 사법시험 효시

소송대리나 법률문서 작성 등 법률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법조전문인력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근대적 변호사 제도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의 고등문관 시험은 조선인이 고등 관료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사법과 합격자는 판사 · 검사 · 변호사 임용 자격을 부여받았다.

사법과 시험은 현재 우리나라 사법시험 제도의 효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그 합격자 수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명확한 통계는 없지만 1925년부터 1943년까지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의 조선인 합격자는 300명이 채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25년의 고등문관 시험 사법과 조선인 합격자는 단 1명이었고,1928년에는 합격자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당시 사회에서 변호사는 매우 희소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등문관시험은 변호사 공급을 규제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일부 독자들은 여기서 '변호사'와 경제학의 '공급'이란 용어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중 · 고교 교과서는 주로 상품시장을 대상으로 하여 수요 · 공급 이론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은 상품시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변호사 시장도 수요와 공급에 가격이 결정되는 엄연한 시장이다.

변호사 공급이 늘면 변호사 가격(변호사 수임료)이 상승하고,공급이 줄면 가격이 하락한다.

고등문관 시험과 같은 자격시험은 변호사 공급을 일정 한도에서 제한시키기 때문에 시장가격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다.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이광수의 '흙'과 변호사 공급 규제
변호사 시장을 단순화시킨 위의 그래프에서 세로축은 변호사 수임료를 나타내고,가로축은 변호사 수를 나타낸다.

변호사 공급이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시장 균형은 E0에서 이루어지고,균형가격은 P0로 결정된다.

이제 정부가 자격시험 등을 통해 변호사 공급을 Q0보다 적은 수준인 Q1으로 제한한다고 가정해보자.

정부가 공급을 Q1으로 제한할 때 소비자가 지불할 용의가 있는 최대 수임료는 P1이고,시장균형은 E1에서 이루어진다.

공급규제로 인해 소비자가 지불하는 가격이 상승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후생 측면에서 분석하면 공급규제로 인해 색칠한 삼각형만큼의 자중손실(deadweight loss)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대학의 경제학 과정에서 상세히 배울 수 있다).

정부가 Q1보다 더 적은 수량에서 공급을 제한하면 가격은 P1 이상이 되고,사회적 후생 손실은 더욱 커질 것이다.

변호사 제한이 후생 손실 키워

이광수의 <흙>에서 주인공 허숭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도 평소의 신념에 따라 결국 농촌운동에 투신하지만 작품 속에서 당시 변호사의 지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은 상당히 많다.

다음은 서울로 떠나는 허숭을 환송하는 야학 송별연 대화의 일부이다.

"너 이번 가면 또 언제 올래?" "글쎄요,내년에나 오지요." "조립(졸업)이 언제야?" "내후년입니다." "법과라지?" "네." "그거 조립하문 경찰서장이나 되나?" "……"

"군 서기도 되겠지. 군수는 얼른 안 될걸." "변호사를 하면 돈을 잘 버나 보더라마는… 그건 또 시험이 있다지?" "네." "걔야 재주가 있으니까 변호사도 되겠지." "변호사는 사뭇 돈을 벌데."

허숭은 아내 정선에게 변호사가 되면 석조전 건물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하는데 이 모두는 당시 변호사 수임료가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음을 나타내준다.

높은 변호사 수임료는 물론 일제강점기만의 얘기는 아니다.

변호사 공급규제가 광복 이후에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일제의 고등문관 사법과 시험을 대신해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이라는 것이 시행됐지만 합격률이 매우 저조해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총 합격자 수는 667명에 불과했다(합격률 평균 1.72%).

1963년 '사법시험령'이 제정되면서 탄생한 현재의 사법고시도 합격률이 저조한 것은 매한가지다.

2000년대 들어서 매년 1000명 안팎의 합격자가 배출되고 있기는 하지만 복잡해진 현대 사회의 변호사 수요를 감안하면 부족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KDI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0년간 우리 법조인력의 증가는 변호사 시장의 변화와 팽창을 따라잡지 못했다.

법조인력의 충분한 공급 필요

사법시험제도는 자격심사제도로서 의미를 가지지만 충분한 변호사인력 공급 측면에서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변호사 인력의 충분한 공급은 수임료 인하뿐 아니라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과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사회에서는 1990년대부터 공급규제 문제를 해결하고 법률가 양성제도를 개혁하려는 논의가 줄곧 이어져왔고,2009년부터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시행되었다.

로스쿨 제도는 컴퓨터공학 · 경제학 등 다양한 전공 배경을 가진 법조인 양성을 취지로 하고 있으며,정원은 연 2000명으로 결정됐다. 기존 사법시험은 아직까지 시행되고 있으나 2017년 폐지될 예정이다.

그러나 로스쿨 정원을 연 2000명으로 정한 것은 변호사 시장의 장기적 변화 추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많은 만큼 정원 확대에 대한 추가적 논의는 불가피해 보인다.

로스쿨 제도를 통해 앞으로 우수한 변호사 인력이 충분히 공급되기를 기대해본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


경제 용어 풀이

공급규제

정부가 시장에서 공급 수량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정책으로, 시장 균형 가격을 상승시키고 사회 후생 손실을 불러오는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