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벤담의 공리주의와 법경제학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본관 건물에는 사람의 유골로 만든 '오토 아이콘(Auto-icon)'이란 것이 전시돼 있다.

이 오토 아이콘은 유골 주인이 평소 입던 옷을 입히고 머리를 밀랍으로 조각해 만들어졌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미라를 대학에서 전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무상자 속에 들어 있는 오토 아이콘의 주인공은 바로 공리주의(utilitarianism)로 이름을 떨친 철학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다.

공리주의, 법경제학 싹 틔워

벤담은 젊은 시절 자신의 시신을 기증한다는 유서를 남겼으며,그가 죽은 후 시신은 해부 실습용으로 사용되었다.

골격을 재조립한 후 오토 아이콘을 만든 것도 그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해부가 살인범에 대한 형벌의 하나로 간주되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놀라운 유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를 단지 기인으로만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의학 발전을 위한 시신 기증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외친 벤담다운 행동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벤담은 1748년 부유한 변호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서너 살 때부터 라틴어를 공부할 정도로 영재였고,15살에 옥스퍼드대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변호사 자격을 얻기는 했지만 법정에서 활동한 기록은 없다.

실무 대신 이론 연구를 택한 그는 정치적으로 급진주의를 옹호했고,영국 법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법개혁의 기본 원리로 제창된 공리주의 철학은 벤담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벤담을 모르는 이들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말은 어딘가에서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가 법경제학(law and economics) 형성에 기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법경제학은 법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경제학자도 아닌 벤담이 법경제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벤담에 의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 따라서 일생에 걸친 개인의 목표는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 된다. 현대 경제학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효용 극대화'가 개인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사회란 개인의 총합이기 때문에 개인의 이익 추구는 곧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된다.

벤담은 또한 개인이 모든 영역에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고 주장했는데,그에 따르면 범죄를 저지르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도 치밀한 계산이 개입된다.

범죄로 인한 이득이 비용(처벌 등)보다 크면 범죄를 저지르고,반대의 경우에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간단한 논리인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렇듯 벤담은 경제학과 전혀 무관해 보였던 범죄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법경제학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체계적인 이론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법경제학이 뿌리를 내리는 데는 의외로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1960년대 이전까지 법경제학은 독점금지법 등 경제규제와 관련된 법 분석에만 주로 초점을 맞췄다.

벤담이 18세기에 이미 폭넓은 시각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좁은 울타리 안에 법경제학이 갇히고 만 것이다.

법경제학 울타리 허문 '코즈'

이런 울타리를 허문 사람은 199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널드 코즈(Ronald Coase)다.

코즈는 1960년 '사회비용의 문제(The Problem of Social Cost)'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재산권 문제를 경제학 영역에 끌어들였다.

이후 법경제학은 민법 · 형법 등 다양한 법률 분야를 다루기 시작했다.

경제학자 스티글러(George Stigler)는 법경제학에 있어 기원전(B.C.)이란 코즈 이전(Before Coase)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법경제학은 아직 우리나라에는 활성화되지 않은 분야다.

그러나 미국 법조계에서는 법경제학이 아주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법경제학 이론이 판례에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미국 유명 로스쿨은 적어도 한 명 이상의 법경제학자를 보유하고 있다.

현직 법조인 중 가장 유명한 법경제학자로는 미 연방 제7항소법원 판사인 리처드 포스너(Richard Posner)를 꼽을 수 있는데,그의 판결문이 나오면 다음날 미국 로스쿨들은 이것을 수업 시간에 다루기 바쁘다.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브루스 애커만(Bruce Ackerman)은 이런 흐름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20세기 법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은 바로 법경제학이다."

법적 정의와 효율성은 모순?

일부 독자들은 정의를 구현하는 법률을 경제학적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경제학의 효율성 잣대로 법을 해석하면 법의 도덕적 측면이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 정의와 효율성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원이 희소한 사회에서 자원의 낭비는 정의에 어긋날 수 있고,정의 실현에는 경제적 자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어떤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므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끌어낸다는 효율성의 원리가 적극 고려될 필요가 있다.

미국 대법원 판사를 역임한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Jr.)는 1897년에 "법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현재는 법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지만,미래에는 통계학과 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법경제학은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

영미법과 달리 대륙법 체계를 따르고 있는 우리나라는 법경제학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렵지만 앞으로 학계의 큰 조류를 무시하긴 힘들어 보인다.

경제학과 법의 본격적 만남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


경제용어 풀이

법경제학(law and economics)

여러 법률 현상들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하는 경제학의 한분야다. 법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또는 법이 경제적으로 효율적인지 등을 주로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