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크리스티나의 세계와 제한된 합리성
앤드루 와이어스(Andrew Wyeth · 1917~2009)가 1948년에 그린 <크리스티나의 세계>(Christina's World)는 미국 현대미술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명작 중 하나다.

와이어스는 20세기 대표적 사실주의 화가이며 1970년 생존 화가로는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와이어스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지만 학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공부한 적은 없다.

몸이 약해 모든 교육을 집에서 받았고 미술은 유명 삽화가인 아버지 뉴웰 컨버스 와이어스(Newell Convers Wyeth)에게 직접 배웠다.

펜실베이니아주 출생인 와이어스는 여름을 메인주 쿠싱(Cushing,Maine)에 있는 별장에서 보냈는데 그의 많은 작품들은 그곳에서의 생활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크리스티나의 세계> 역시 쿠싱에서 그린 작품이다.

제한된 세계에 살고 있는 그녀

그림에서 멀리 보이는 집은 쿠싱의 농장에 있는 올슨(Olson)가(家)의 저택으로 와이어스는 가까운 이웃으로서 이 저택을 자주 드나들며 2층 방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그림의 모델인 된 여인은 올슨가의 일원인 크리스티나 올슨(Christina Olson · 1893~1968)이다.

크리스티나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불편했지만 휠체어 타기를 한사코 거부했다고 한다. 그런 탓에 그녀는 기어서 농장 주변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2층 작업실에서 초원 한가운데 홀로 있는 그녀를 발견한 와이어스는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를 결심한다.

하지만 와이어스는 몸이 불편한 그녀에게 장시간 포즈를 취하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림이 그려질 당시에 그녀는 이미 55세의 나이였다.

와이어스는 결국 아내 베시(Betsy James)를 실제 모델로 써 그림을 완성했다.

베시가 크리스티나를 대신하긴 했지만 그림 속 여인의 팔다리와 핑크색 드레스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와이어스의 그림에서 크리스티나의 장애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약간 비틀린 몸과 앙상한 팔다리는 그녀의 몸 상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림에 그려진 것은 그녀의 뒷모습이기 때문에 그녀의 표정은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심리 역시 파악하기가 힘들다.

와이어스는 그림을 그린 후 사람들로부터 크리스티나가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는 편지를 수없이 많이 받았지만 자신도 사실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회고했다.

그림에서 크리스티나는 광야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농가를 바라보고 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금방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멀어 보인다.

불편한 몸과 휠체어를 거부하는 고집스런 성격 때문에 그녀의 세계는 농가 주변으로 국한되고 만 것 같다.

그런데 제한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은 과연 그녀뿐일까?

필자가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보면서 떠올린 것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었다.

'제한된 합리성' 개념 제시

원래 전통적 경제학 이론은 모든 인간이 평균적으로 합리적이라고 가정한다.

합리적이란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만족을 극대화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교과서의 소비자 이론 등은 모두 인간이 합리적이란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러한 가정에 상당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학자들조차도 일상생활에서 모든 의사결정을 이론과 정확한 계산에 근거해 내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정확한 상황 판단을 바탕으로 최적의 선택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고 주변 상황을 인지하는 능력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완벽한 합리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의문이 제기된 것은 1950년대부터다. 1956년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 · 1916~2001)이란 학자는 논문을 통해 '제한된 합리성'이란 개념을 제시하고 인간은 부분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제한된 합리성은 정보의 부족,인지능력의 한계,시간적 제약 등 때문에 인간의 합리성이 제한된다는 것을 말한다.

사이먼에 의하면 제한된 합리성에 관한 이론은 '만족화'라는 용어로 집약될 수 있다.

만족화(satisficing)는 '만족하다(satisfy)'와 '충분하다(suffice)'의 합성어로 제한된 합리성 때문에 사람들이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하지 않고 본인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그만둠을 의미한다.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스마트폰 구입을 예로 들어보자.

소비자 이론에 부합하는 합리적 쇼핑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만족을 극대화하는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소비자들이 수많은 종류의 스마트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미리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날의 기분이 스마트폰 선택을 크게 좌우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인터넷몰이나 오프라인 매장 등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스마트폰을 구입하지만 더 싸고 품질이 좋은 스마트폰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심리적 관점서 경제행위 분석

사이먼은 제한된 합리성 이론을 개인이 아닌 조직에도 적용을 했고 1978년에는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사이먼은 경제학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사실 정치학자 혹은 심리학자에 가깝다. 정통 경제학자가 아닌 사이먼에게 노벨경제학상이 부여된 것은 제한된 합리성을 비롯한 인간의 심리에 대한 연구가 주류 경제학의 한 분야로 인정받았음을 뜻한다.

최근 경제학계에서는 심리적 관점에서 인간의 경제적 행위를 분석하는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 큰 주목을 받고 있고 앞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제한된 합리성은 인간이 최적의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인간이 비합리적이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크리스티나의 세계>에서 크리스티나는 외롭고 처량해 보이지만 절망과 좌절만이 그림의 주제는 아니다.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전시되어 있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그림 설명에는 '희망'이란 단어가 적혀 있다고 한다. 황금색 들판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는 물리적 제약을 뛰어넘은 희망의 빛이 담겨 있는 것이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


경제용어 풀이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개인이 의사결정을 할 때 정보의 부족,인지능력의 한계,시간적 제약 등으로 최적의 선택을 하기 어려움을 뜻하는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