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남해 거품사건과 뱅크런
18세기 초 유럽에서 '남해(South Seas)'는 남아메리카 부근의 해역을 일컫는 말이었다.

1711년 영국의 재무장관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는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는데,이 회사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아프리카 노예를 남아메리카 스페인령에 공급하는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다.

남해회사는 표면적으로는 무역회사였지만 운영 목적은 여타 무역회사와 사뭇 달랐다.

당시 영국은 군사비 지출 등으로 재정이 상당히 악화된 상태였고,국가부채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재무장관 할리는 남해회사를 설립하면서 정부의 부실채권을 남해회사 주식으로 전환하였다. 무역을 통해 이윤이 창출되면 부실채권이 정리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풀리지 않았다.

스페인 정부가 정한 노예 무역량은 충분치 않았고,잦은 해난사고로 큰 손실이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718년 영국과 스페인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남해회사는 더욱 어려워졌다.

영국 강타한 남해 거품사건

위기에 빠진 남해회사는 1719년 막대한 금액의 주식발행 권한을 얻어내어 금융회사로의 변신을 꾀하게 된다.

남해회사의 경영 상태를 상세히 알지 못했던 일반인들은 막연한 기대심리에 남해회사 주식을 매입했다.

남해회사 주가가 계속 상승하면서 영국에는 투기 열풍이 불게 되었고,너도나도 주식 매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남해회사 본업인 무역이 부진한 상황에서 이런 열풍은 오래갈 수 없었다.

1720년 주가가 폭락하면서 거품이 빠지게 되었는데,역사에서는 이를 '남해거품사건(South Sea Bubble)'이라 부른다. 남해거품사건이 영국 사회에 남긴 상처는 컸다.

일확천금을 노리던 '남해 졸부'들은 일순간에 큰돈을 잃게 되었다.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경우에는 남해회사 주식 구입으로 2만 파운드의 손해를 입었다고 한다.

거품 붕괴의 영향은 은행으로까지 이어졌다. 오늘날 영국의 중앙은행으로 발전한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고객들에게 남해회사 채권을 400파운드에 소화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는데,이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영란은행에 대한 신뢰를 잃은 고객들은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 앞에 몰려들었다. 대규모의 예금 인출을 뜻하는 '뱅크런(bank run)' 사태가 18세기 초에 벌어진 것이다.

경제사학자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의 저서 《광기,패닉,붕괴 · 금융위기의 역사(Manias,Panics,and Crashes · A History of Financial Crises)》에 의하면 당시 영란은행의 뱅크런 대처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영란은행은 뱅크런 사태가 발생하자 친분이 있는 지인들을 인출 행렬 맨 앞에 세우고,인출금을 6펜스짜리 주화로 천천히 지급해주었다. 지급 받은 이들은 받은 돈을 그대로 들고 다시 은행 뒷문으로 들어가 예금했다. 영란은행은 이러한 방법으로 인출쇄도를 버텨냈고,그러는 동안 신뢰를 회복해 다시 정상영업을 할 수 있었다.>>

영란銀, 트릭으로 뱅크런 모면

뱅크런은 기본적으로 '남해거품사건'과 같이 경기가 비이성적으로 과열되었다 침체되는 과정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은행이 수익을 얻는 주된 방법은 고객들의 예금을 바탕으로 대출을 하여 이자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예금으로 받은 돈을 모두 대출에 사용하면 고객들의 예금인출 요구에 응할 수 없으므로 은행들은 예금의 일정 부분을 현금으로 보유하는데,이를 지급준비금(reserves)이라 한다.

고객들이 동일한 날 동시에 예금을 인출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에 은행들은 보통 예금의 전체가 아닌 일부만을 지급준비금으로 가지고 있다.

은행 입장에서는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대부분의 은행들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지급준비금 규모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국가들은 법률로 지급준비금의 규모를 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금융기관이 예금의 종류에 따라 전체 예금의 0~7%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준비금으로 한국은행에 예치하도록 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예금자들의 예금인출이 안정적 분포를 보인다. 그러나 경영상태 악화 등의 이유로 예금지급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면 불안감 때문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은행에 몰려들어 뱅크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은행들의 지급준비금은 통상 전체 예금의 몇 %밖에 되지 않고,대출금을 정해진 기일보다 빨리 회수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고객들의 예금인출 요구가 쇄도하게 되면 어떤 은행도 버텨낼 재간이 없다.

뱅크런은 경우에 따라 은행의 경영상태가 실제로 악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 헛소문이 퍼져 일어나기도 한다. 루머로 인해 건강한 금융기관이 파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뱅크런의 발생은 단지 해당 은행의 파산으로 끝나지 않는다. 금융기관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뱅크런으로 인한 파산은 다른 금융기관들에도 악영향을 미쳐 금융시스템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면 실물경제 또한 흔들리게 되고,경제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최근 가장 유명했던 뱅크런 사태로는 2007년 영국 노던락(Northern Rock) 은행의 파산을 들 수 있으며,올해 우리나라 부실 저축은행들의 영업정지 전에 나타났던 예금인출 행렬도 뱅크런으로 볼 수 있다.

예금보호 제도의 한계

과거 영란은행은 일종의 트릭을 사용해 인출 쇄도를 견뎌냈지만 24시간 내내 인터넷 금융이 이루어지는 현대에 이러한 방법은 별 소용이 없다.

뱅크런으로 인한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최후에는 중앙은행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데,금융위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하여 금융시장에 일시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기능을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이라 한다.

금융당국은 뱅크런을 사전에 방지하기위해 예금보호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주로 소액 예금자를 보호하고 전체 예금을 보호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예금보호제도가 뱅크런의 완벽한 대비책이 되긴 어렵다.

그리고 정부가 모든 것을 보장해준다면 은행들이 점점 위험한 영업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뱅크런에 대한 현명한 대비책은 과연 무엇일지 독자들도 함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


경제용어 풀이

뱅크런(bank run)

은행의 예금지급 불능이 예상되어 고객들이 대규모로 예금인출을 하는 현상

지급준비금(reserves)

은행이 고객의 예금지급 요구에 응하기 위해 준비해놓는 자금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

금융위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하여 금융시장에 일시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기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