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에너지·GS칼텍스 등 ℓ당 100원씩 내리기로
[Focus] 기름값 인하 정부 압박에 백기든 정유사··· 시장원리 무시한거 아냐?
지난 3일 국내 정유업계 1위인 SK에너지는 전격적으로 7일부터 전국 모든 SK 주유소에서 판매되는 휘발유와 경유의 가격을 ℓ당 100원씩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고객이 신용카드로 결제한 금액 중 SK가 ℓ당 100원을 카드사에 대신 지급하고,카드사는 소비자에게 이를 뺀 금액만큼 청구하는 방식이었다.

다음날 GS칼텍스는 관련 시스템이 갖춰지는 대로 할인혜택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에쓰오일은 5일 휘발유와 경유의 주유소 공급가격을 ℓ당 100원씩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현대오일뱅크마저 6일 이 대열에 합류하자 GS칼텍스도 결국 이날 저녁 늦게 주유소 공급가격 인하에 동참하겠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정유 4사가 동시에 ℓ당 100원 인하를 단행한 셈이다.

◎ 이 대통령 "기름값이 묘하다. "

발단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월13일 열린 국민경제대책회의에서 한 말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회의를 주재하며 "유가가 어떤 것보다 다른 물가에 미치는 파급력이 크다"면서 "기름값을 보면 주유소 등의 행태가 묘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의 현물가격이 배럴당 94달러를 돌파하면서 2008년 9월 이후 2년3개월 만에 최고치를 뚫었을 때였다.

같은 시간 공정거래위원회 직원 100여명은 정유 4사와 액화석유가스(LPG) 수입업체 두 곳을 찾아 조사를 벌였다.

당장 정유업계에선 "정부가 물가 상승의 책임을 기업에만 물으려 하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공정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자 정부가 시장을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비판도 커졌다.

2009년 9월 이 대통령의 "LPG,우유 등 서민물가를 관리하라"는 발언 이후 홍역을 치렀던 LPG 업계의 사례도 다시 거론됐다.

정유업계는 곤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정유사 한 관계자는 "기름값은 제조과정과 유통체계가 단순하고 원가와 환율 등 가격에 영향을 주는 변수가 투명하게 공개돼 있다"며 "기름값이 높긴 하지만 가격을 내릴 여지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 기름값 구조 논란으로 번져

논란은 기름값 구조로 번졌다. 정유업계에선 작년 말 기준 1804원80전이던 휘발유 가격 가운데 유류세가 절반에 가까운 900원10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에선 높은 기름값을 잡기 위해선 정부가 유류세를 낮춰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국제 제품가격에 따라 움직이는 국내 기름값의 가격 결정 방식도 도마에 올랐다.

정부는 국내 정유사들이 해외에서 원유를 들여와 정제해 파는 점을 들어 국제 원유값을 바탕으로 국내 가격을 정하는 방법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내가 공인회계사다. 원가장부를 들여다보겠다"며 정유사들을 마치 폭리를 취하는 집단처럼 몰아붙였다.

정유사 한 임원은 "소 한 마리에서 등심은 얼마,안심은 얼마,꼬리는 얼마 이런 식으로 나눌 수 있냐"고 반문하면서 "원유를 정제하면 LPG에서부터 경유,등유 등 다양한 제품이 나오는데 원가를 정확하게 측정한다는 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고 항변했다.

◎ 정부의 압박은 더 강해져

정부는 석유가격 태스크포스(TF)를 구성,기름값을 인하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뾰족한 답을 얻진 못했다.

이렇게 되자 정부가 조급해졌다. 직접 원가 계산을 해보겠다고 나섰던 최 장관은 지난달 23일 한 행사에서 "영업이익이 나는 정유사들은 적자를 내고 있는 한국전력이나 제당업계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

성의 표시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정유업계를 압박했다.

정유업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두 달 가까이 온갖 자료를 다 가져가 놓고선 이제 와서 '성의 표시'로라도 기름값을 내리라는 주문에 "황당하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TF 결과가 뜻대로 나오지 않자 장관이 나서서 업체들을 압박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커졌다.

이미 TF는 결과 발표 시한으로 예고했던 2월 말을 넘기고,3월 중순으로 알려졌던 2차 시한마저 그냥 보내 버린 상태였다.

이어 공정위가 정유 4사에 사상 최대 규모의 과징금을 매길 것이라는 소문이 흘러 나왔다.

김동수 공정위원장이 3월 중순 "정유사들의 원적지 관리를 담합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다.

5월 중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한 데 이어 과징금 규모가 LPG 업계에 지난해 부과했던 6689억원을 웃돌 것이란 소문도 무성했다.

◎ 정유사들 ℓ당 100원 인하로 내몰려

정부의 전방위 압박에 굴복한 정유사들은 SK에너지를 시작으로 차례로 휘발유와 경유 가격을 ℓ당 100원씩 내리기로 결정했다.

SK에너지는 고객의 카드 대금에서 ℓ당 100원을 카드사에 대신 납부하는 사상 초유의 방법까지 동원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공장도 가격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주유소까지 가격 인하 효과가 이어지지 않을 수 있어 소비자에게 직접 돌려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최 장관의 이른바 '성의표시' 요구에 업계가 답한 것이라는 시각이 불거졌다.

다른 업체들은 인하 대열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합류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카드사 시스템을 갖춘 뒤에 할인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던 GS칼텍스는 에쓰오일과 현대오일뱅크가 잇따라 주유소 공급가격을 인하한다고 발표하자 기존 방침을 번복하고 다른 업체와 같이 7일부터 공급가격 인하를 단행했다.

이 대통령이 "기름값이 묘하다"고 말한 1월13일 이후 두 달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ℓ당 1823원 수준이던 전국 휘발유 평균가격은 국제 가격 상승에 따라 오히려 1971원대로 치솟았다.

◎ 시장 원리는 아냐

지난 6일 정부는 석유가격 TF 결과를 내놓았다.

애초 꼼꼼히 살펴보겠다던 국제 가격과 국내 가격의 비대칭성과 기름값 구조개선 등에 대한 결론은 빠진 알맹이 없는 발표에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이냐"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기름값이 묘한 게 아니라 정부 발표가 '묘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전문가의 의견은 묵살하고 과거에 거론됐던 대안들을 재탕,삼탕했다고 꼬집는 의견도 많았다.

정유사가 기름값을 내리기로 하고 TF의 결과가 발표되며 기름값 논쟁은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각 사별로 수천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한 정유업계의 결정에 정부는 "고유가로 인한 국민의 부담을 나눠지겠다는 뜻을 높이 평가한다"는 반응을 내놨다.

정유사들 사이에서도 "할 만큼 했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하지만 과연 이 같은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가격 인하가 국가 경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3개월 뒤 억눌려 있던 가격이 한꺼번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에 더해 공급 가격 인하가 주유소 가격 하락으로 그대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무엇보다 정부가 가격 인하를 유도함으로써 경쟁이라는 시장원리를 무시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게 됐다.

한 경영학과 교수는 "정유사를 압박해 가격을 내린 행태는 정부가 암묵적으로 담합을 인정하고 이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거꾸로 인정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조재희 한국경제신문 기자 joyjay@hankyung.com

◎ 용어설명

석유가격 비대칭성

국제 제품값이 오를 때는 국내 가격이 더 많이 오르는 반면 국제시세가 내릴 땐 국내 가격이 조금만 떨어지는 현상.

정부에선 정유사들이 이익을 늘리기 위해 국제 가격 상승시엔 빨리 따라가고,하락할 땐 느리게 반영한다는 판단하에 석유가격 태스크포스(TF)를 구성,분석에 나섰지만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얻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기간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대칭성에 대한 결과가 달라진다는 입장을 내놨다.

가격 인상에 민감한 소비자들의 심리가 영향을 끼친다는 풀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