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빌리 엘리어트’와 영국 광부 파업
빌리는 잉글랜드 북동부 더럼 카운티(County Durham) 에버링턴(Everington) 마을에 살고 있는 11살 소년이다.

빌리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이며,아버지 재키 엘리어트와 형 토니가 빌리를 돌보고 있다. 광부인 아버지와 형은 현재 파업 중에 있다.

파업으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도 빌리에게 매일 50펜스씩을 주어 스포츠센터에서 권투를 배우게 한다.

하지만 빌리는 권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우연한 기회에 배우게 된 발레에 빠져든다.

발레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처음에는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것을 반대하지만 빌리가 발레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아들을 런던 로열발레스쿨에 보내기로 마음먹는다.

위의 이야기는 2000년 개봉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빌리 엘리어트'는 2001년 동명의 소설로 만들어졌으며, 2005년에는 엘튼 존(Elton John) 작곡의 뮤지컬로 제작되어 런던 웨스트 엔드(West End)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에버링턴은 가상의 마을이지만 빌리 아버지와 형의 파업은 실제로 있었던 영국 광부 파업(1984~1985년)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영국 광부 파업의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쟁은 흔히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수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국민은 국가의 통제에 익숙해졌고,국가에 점점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경제학자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는 국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 국민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영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그의 이름을 따 '베버리지 리포트(Beveridge Report · 정식 명칭은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라고 불리게 되었는데,베버리지 리포트는 결핍 · 질병 · 나태 · 무지 · 불결을 사회의 5대악(five giant evils)으로 규정했다.

베버리지 리포트는 수십만 부가 팔릴 정도로 영국 사회에서 큰 화제를 불러 모았지만 처칠(Winston Churchill)의 보수당 정권은 보고서의 내용이 너무 급진적이란 이유로 베버리지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것은 처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총선거에서 노동당에 패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1945년 총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노동당은 노동조합의 지지로 탄생한 정당이다.

전후에 영국 국민은 황폐해진 조국에 사회보장제도란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한 노동당을 선택했고, 노동당 총수인 애틀리(Clement Attlee)는 새로운 수상이 되었다.

애틀리는 변호사 집안에서 자란 중상계급 출신이었으나,새 정부의 각료 37명 가운데 8명은 광부 출신이고 11명은 노조 지도자였다.

정권을 잡은 애틀리는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포괄적 복지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각종 사회개혁을 시행해 나갔다.

애틀리 집권 시기에 이루어진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주요 산업의 국유화이다.

1694년 설립되어 현재 영국 중앙은행 역할을 맡고 있는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은 본래부터 국가가 운영한 것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애틀리가 1946년 국유화를 시키기 전까지는 민간이 운영을 했었다.

애틀리의 재임기간 중 이미 국유화돼 있던 라디오방송(BBC)과 전신 · 전화 등을 비롯해 석탄 · 철강 · 항공 · 철도 · 가스 · 전기산업 등 영국 주요 산업 대부분이 국유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51년 애틀리가 물러나고 보수당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나 총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노동당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영국호(號)의 방향을 돌려놓을 힘을 얻지는 못했다.

보수당 인사들까지 국유화와 사회복지 확대를 인정하게 되면서 영국의 변화는 고착화되었다.

한편 노동조합의 힘은 갈수록 커져 갔고,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권을 퇴진시킬 정도로 그 힘이 막강해졌다.

1973년 오일쇼크가 발생하여 석유의 대체에너지로 석탄이 부각되자 광산 노동자들은 이를 기회 삼아 임금인상을 요구하였다.

보수당의 히스(Edward Heath) 수상은 이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거부하였고,광부들은 1974년 전국적 파업을 일으켰다.

히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통해 광부조합과 정부 중 '누가 통치해야 할 것인가'를 국민에게 물었지만 선거에서 패배해 사임하게 된다. 이후 노동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지만 노동조합의 파업은 계속되었다.

경기침체로 정부가 임금을 동결하자 노동조합들이 1978년 겨울에 다시 대규모 파업을 일으킨 것이다.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 · 1978~1979년)'이라 이름 붙여진 이 파업 시기에 공동묘지 인부들은 시체 묻기를 거부하였으며, 청소원들의 파업으로 길거리는 온통 쓰레기 천지가 되었다.

노동당 정권은 불만의 겨울로 인해 국민의 신임을 잃게 되었고,1979년 5월 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해 철의 여인(Iron Lady)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영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수상이 된다.

대처가 수상이 되었을 때 영국의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영국은 1976년 파운드화 가치 하락으로 IMF 구제금융을 받았으며,과도한 사회복지와 국유화로 인한 비효율성 문제는 '영국병'이란 말까지 만들어냈다.

식료품상의 딸로 수상 자리까지 오른 대처는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 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를 수용한 그녀는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했고,시장에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영국병을 치유하고자 했다.

국유화된 많은 부문에서 문제가 발생했지만 가장 문제가 심각한 부문은 막대한 적자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석탄산업이었다.

애틀리 정부 때 국유화된 석탄산업은 국립석탄국(NCB · National Coal Board)이 경영을 맡았는데, 매년 엄청난 보조금이 투입되었다.

1975년부터 영국의 북해유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석탄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노조의 입김 때문에 경영합리화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석탄 매장량이 감소하면서 채굴을 위해서 점점 더 깊게 땅을 파야했고,채굴비용은 계속 상승했다.

영국 정부는 석탄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에서의 석탄 수입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미봉책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전국광부조합(NUM · National Union of Mineworkers)은 1974년에 정권을 퇴진시킨 바 있는 최강성 노조였기 때문에 대처 이전의 수상들은 감히 석탄산업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대처는 철강산업에서 구조조정으로 소기의 성과를 이룬 전문경영인 이안 맥그리거(Ian Macgregor)를 1983년 국립석탄국 총재로 임명하여 석탄산업 개혁을 시도하였다.

전직 광부 아서 스카길(Arthur Scargill)이 이끄는 전국광부조합은 이를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뒤이어 경제성이 떨어진 탄광을 폐쇄하고, 인력을 감축하는 석탄산업 합리화안이 발표되자 스카길은 1984년 3월 전면 파업을 선언하였다.

전국광부조합 위원장 스카길은 15살의 나이에 학교를 떠나 광부가 된 인물로,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막강한 카리스마로 조직을 이끌어 아돌프 스카길이란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 전기생산의 75%는 석탄에 의존하기 있었기 때문에 파업의 장기화는 경제에 치명적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처는 광부파업을 포클랜드 전쟁에 비유하며 단호하게 대응했다.

1974년 히스 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파업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놓고 있었던 대처는 노조와 타협하지 않고 광부들을 꾸준히 설득해 나갔다.

임금을 받지 못한 파업광부들의 생활은 점차 어려워졌는데,당시의 상황은 빌리 아버지가 겨울에 죽은 아내가 아끼던 피아노를 부숴 땔감을 마련하던 '빌리 엘리어트'의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터로 가는 광부를 태운 택시기사를 파업광부들이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광부파업에 대한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1년여의 시간을 끈 광부파업은 결국 전국광부조합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전국광부조합의 패배는 대처 정부의 자유시장경제 정책 추진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본 후 빌리를 꼭 훌륭한 발레리노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빌리 아버지는 파업에 참여한 동료 광부들로부터 배신자(scabs) 소리를 듣는 것을 참으며 돈을 구하기 위해 탄광에 복귀하지만,빌리의 형 토니의 만류에 결국 울부짖는다. 가슴 아픈 아버지의 눈물이 다시는 역사에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