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좀머 씨 이야기'와 라인강의 기적(上)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소설 [좀머 씨 이야기](Die Geschichte von Herrn Sommer)는 우리나라에서 출간 초기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10대 독자들을 중심으로 점차 입소문이 퍼지면서 1995년 말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하였고, 결국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한 편의 동화와도 같은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고른 연령층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46개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1200만부 이상이 팔리고,2006년 영화화되기도 한 장편소설 [향수](Das Parfum)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저자 쥐스킨트는 폐쇄적 성격의 은둔 작가로 유명하다.

작품들의 잇따른 성공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독일 문학계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일체의 인터뷰와 사진촬영을 거부하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자신의 거취가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 약간의 정보라도 누설하는 친구가 있으면 가차없이 절연을 한다고 한다.

[좀머 씨 이야기]는 그의 자전적 소설로,화자인 어린 소년과 소년이 목격한 기인 좀머 씨 모두에 그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우선 소년의 성장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1949년 독일 슈타른베르크 호숫가의 암바흐(Ambach am Starnberger See)에서 태어난 쥐스킨트의 경험담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좀머 씨의 기행은 세상을 멀리하는 쥐스킨트의 현재 모습과 닮아 있다.

좀머 씨는 배낭을 메고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 소년이 살고 있는 호숫마을 근방을 매일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걸어다니지만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회피한다.

좀머 씨가 나치에게 학대받은 유대인인지,아니면 전쟁 중에 겪은 참혹한 경험으로 고통 받는 참전군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걷고 또 걸을 뿐이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의 부인이 인형을 만드는 일로 돈을 번다는 것 정도다.

<<좀머 아저씨가 우리 마을로 이사와서 정착했던 전쟁 직후에는 사람들이 전부 배낭을 메고 다녔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그런 그의 그런 행동이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휘발유도 없었고,자동차도 없었으며,하루에 딱 한번만 버스가 운행되었고, 땔감도 없었으며, 먹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서 달걀 몇 개를 구해 온다거나,밀가루나 감자 혹은 석탄을 1㎏쯤 가져 온다거나,하다못해 편지지나 면도날을 구하러 가야만 했을 때도 몇 시간이든 걸어서 갔다가,구한 물건들을 손수레에 싣거나,배낭에 짊어지고 집으로 운반해 오곤 했었다. >>

소년의 서술에서 엿볼 수 있듯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경제적 상황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전쟁으로 산업시설이 상당수 파괴되었고,노동력 손실도 엄청났다.

독일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재무부 장관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Jr.)는 1944년 독일을 분할한 후 산업시설을 해체하여 원시적인 영구 농경국가로 만들겠다는 전후 처리계획,일명 모겐소 플랜(Morgenthau Plan)을 내놓았다. (모겐소는 유대인이었는데,이 때문에 이렇게 과격한 주장을 내놓았다는 주장도 있다).

모겐소 플랜은 결국 여러 반대에 부딪쳐 채택되지 않았지만 종전(1945년) 후 4개국 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분할점령 시대에 독일의 생산활동은 각 산업마다 일정 한도에서 제한되었고,막대한 전쟁배상금이 부과되었다.

산업 요지이자 석탄 산지인 자를란트(Saarland)는 프랑스에 양도되었는데,프랑스는 1957년의 영토 반환 이후에도 1981년까지 이 지역에서 석탄을 채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독일의 1947년 산업생산은 1938년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렇듯 물리적 손실이 컸지만 비물리적 손실도 이에 못지않았다.

연합군은 독일이 자국과 해외에 보유하고 있는 지적소유권을 광범위하게 빼앗았으며,이 중 일부는 곡물을 수입하여 독일에 공급해준 대가 대신 받아가는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연합군은 독일로부터 빼앗은 지적소유권을 연합군 국적의 회사들에게 나누어주어 자국 산업발전을 돕고자 했다.

특히 미국과 소련은 독일의 우수한 과학자들까지 자국으로 이주시켜 기초과학 발전에 기여하도록 했는데,전범인 나치 과학자들을 종이 클립으로 집어 따로 분류한 후 이주시키는 미국의 방침은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으로 불렸다.

역사학자 존 짐벨(John Gimbel)은 미국과 영국이 받은 '지적 배상금(intellectual reparations)' 규모만 따져도 약 100억달러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황폐화된 토지가 많아 농업생산도 부진했으므로 독일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많은 국민들이 기아에 허덕였으며,위생 시설 부족으로 전염병까지 창궐하였다.

1806년 독일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해 위기에 처했을 때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이란 우국 대강연을 통해 독일 국민들의 용기를 고취시킨 바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미래는 피히테의 강연이 다시 필요해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여기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경제 교과서에서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례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이다.

당시 독일에서 물가가 무섭게 치솟아 물건을 사러 갈 때 손수레로 돈을 운반해야 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 직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독일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나타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겪었던 후유증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1936년부터 히틀러(Adolf Hitler)가 정부가 전쟁물자를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강력한 가격통제(price controls)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독일에 입성한 연합군은 가격통제를 그대로 이어갔다. 교과서에서 배운 바와 같이 가격상한제하에서는 공급부족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1947년에 요구불예금을 포함한 독일의 통화량은 1936년에 비해 5배가량 늘어났는데 그 기간 동안 가격통제 때문에 물가는 조금밖에 상승하지 않았고, 식량의 경우에는 공급부족 현상이 심각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오히려 억압된 인플레이션이 문제였던 것이다.

가격상한제로 나타나는 공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배급제인데, 나치도 1939년부터 각종 물품에 대한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독일 국민들은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직접 곡물을 심거나 물물교환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가격통제와 배급으로 인해 시장은 그 의미가 없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머 씨 이야기]에서 소년이 전쟁 직후에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오가야 했다고 표현한 것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추측된다.

다음은 [좀머 씨 이야기]에서 전쟁 직후의 상황 설명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난 다음에는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마을 안에서 살 수 있게 되었고,석탄은 배달이 되었으며, 버스는 하루에 다섯 번씩 운행되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지나자 정육점 주인이 자가용을 굴렸고,다음에는 시장이 차를 샀고,그 다음에는 치과 의사가 샀다.

그리고 페인트 칠장이인 슈탕엘마이어 씨는 큰 오토바이를 사서 타고 다녔고,그의 아들도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으며, 버스는 그래도 여전히 하루에 세 번은 다녔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 있다거나,여권을 갱신해야만 되는 등의 할 일이 있더라도 네 시간이나 걸어서 군청 소재지까지 갔다 오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좀머 아저씨 말고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

천진난만한 소년의 설명에서 우리는 독일의 희망찬 비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유명한 라인강의 기적이 시작된 것이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