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러시아 역사를 통해 살펴본 사회주의 계획경제 (下)
1953년 뇌일혈로 스탈린이 사망했다.

독살 의혹이 제기될 정도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고, 후계자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스탈린의 심복이자 2인자로 인정받고 있던 말렌코프(Georgy Malenkov)가 각료회의 의장(총리)직을 맡게 되었으나,비밀경찰 책임자 베리야(Lavrentiy Beria),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 등과 권력을 분할해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소련의 신지도부는 집단지도체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야심 많은 정치가들의 공조는 오래갈 수 없었다. 집단지도체제의 출범과 동시에 치열한 내부 권력투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권력자들의 빗나간 약속들

제일 먼저 제거된 사람은 비밀경찰을 이끌면서 악명을 쌓았던 베리야였다.

베리야는 자신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씻어내고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애썼으나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동독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일어나자 베리야의 반대자들은 그가 동독을 포기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베리야는 결국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된다. 베리야와 연합했던 말렌코프 역시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말렌코프의 경우 실각의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은 바로 경제 문제였다.

1950년대에도 소련은 계속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복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었으며,이 시기에는 서구의 국가들도 모두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또한 높은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소련 소비자들의 만족도는 별로 향상되지 않았다.

스탈린 시절에 중공업 육성을 위해 소비재 생산이 희생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소련은 생산재 산업을 '그룹 A',소비재 산업을 '그룹 B'라고 부르며 서로 분리했었는데, 그룹 B는 오랫동안 천대를 받았다.

말렌코프는 집권을 하면서 스탈린의 과오를 답습하지 않고,소비재 생산을 활성화시키겠다고 공약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소비재 생산목표는 달성되지 않았고,농업부문의 생산도 부진했다.

베리야 제거에 앞장섰던 흐루시초프는 말렌코프의 정책 실패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공산당에 입당한 후 출세가도를 달린 흐루시초프는 농업전문가로 평가받고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당에 제안하였고,당중앙위원회는 이를 수용하였다.

말렌코프는 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흐루시초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서구에서도 놀랄 정도로 스탈린의 독재와 잔혹함을 강하게 비판했지만,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버리지 않았다.

입으로는 다른 국가들과의 평화와 공존을 외쳤지만,유엔 총회에서 불쾌한 발언을 듣자 구두를 벗어들어 탁자를 두드리는 등 난폭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이중성은 경제문제에서도 드러났다. 흐루시초프는 소련 소비자들의 옹호자처럼 행동했지만,경공업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마르크스-레닌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다.

경제에 있어서 그의 가장 큰 실수는 지킬 수 없는 장밋빛 약속을 남발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초에 그는 향후 10년 내에 소련의 공업생산이 경쟁자인 미국의 공업생산을 추월하고,10~20년 후에 소련이 어떤 자본주의 시장경제 국가들보다도 높은 생활수준을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과의 생활수준 격차가 다소 좁혀지는 데 그쳤고,국민들은 그의 약속이 환상이었음을 곧 깨닫게 된다.

⊙ 한계에 봉착한 사회주의 계획경제

1964년 흑해 연안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흐루시초프는 자신이 공산당 제1서기직과 각료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나길 당에 요청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흐루시초프 본인에게는 금시초문의 일이었다.

이는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계획한 일로,흐루시초프 실각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미래에 대한 허황된 공약들이었다.

계략으로 흐루시초프를 몰아낸 브레즈네프는 소련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에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폐해는 극에 달하게 된다.

다음은 혁명 이후 소련의 발전 과정을 열차에 비유한 유명한 우스갯소리이다.

첫 번째 기관사(레닌)는 안간힘을 쓴 끝에 열차를 가동시키는 데 성공한다. 뒤이어 등장한 새로운 기관사(스탈린)는 열차의 속도에 만족하지 못해 일부 승무원과 승객들을 총살한다.

두 번째 기관사가 물러나고 여태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운행을 해야 한다는 기관사(흐루시초프)가 등장하지만,실패한 실험들로 쫓겨나고 만다.

네 번째 기관사(브레즈네프)가 열차를 맡자 열차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서고 만다.

브레즈네프가 특별한 실책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재임 시절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곪을 대로 곪아버린 문제점들을 치유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가장 열렬한 비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나침반 없이 대양을 횡단하는 체제라 평가했다.

미제스에 의하면 가격의 올바른 결정은 시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는 시장의 기능을 무시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가격결정과 자원배분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소련 계획경제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기구는 연방국가계획위원회 고스플랜(Gosplan)이다. 고스플랜은 5개년 계획 같은 중장기 국가발전계획은 물론 매년의 실천계획까지도 수립하였다.

고스플랜의 중앙계획은 각종 생산물의 생산에 투입되는 생산요소의 양과 산출목표까지 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계획 과정이 지극히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공장 하나의 1년 계획을 작성하는 데 필요한 서류가 1만 페이지를 훌쩍 넘기도 했으며, 소련의 한 수학자는 계획체계가 현대화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 작업에 소련 전 성년 인구가 필요할 것이란 언급을 하기도 했다.

복잡한 과정 때문에 통상 1년 전부터는 계획에 착수하므로 매해 계획은 최소 2년 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립되었다.

예컨대 1970년의 계획은 전년에 1968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립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스플랜은 경제 여건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다.

경제학자 와일스(Peter Wiles)는 완전경쟁(perfect competition)에 대응하여 완전계산(perfect computation)이란 용어를 만들었는데,계획당국에 의해 최적의 자원배분이 이루어지는 완전계산은 완전경쟁만큼이나 현실성이 결여됐던 것이다.

계획경제의 문제점은 계획의 수행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계획경제에서는 중앙계획을 강제로 따를 수밖에 없으므로 각 기업들은 계획에 조그만 틈이라도 있으면 이를 악용하려 한다.

가장 대표적 사례로는 못 생산을 들 수 있다.

어떤 기업이 1000개의 못 생산량을 생산목표로 받았지만,상황이 안 좋아 바늘만한 못 1000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중량으로 목표가 내려왔지만 1t짜리 못 3개를 만들어 목표를 달성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소련에서 실제로 발생했었던 일들이다.

흐루시초프는 한 연설에서 소련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샹들리에가 있지만 이를 걸어놓을 곳이 없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이렇게 기업들이 계획당국의 생산목표만 맞추려 하므로 소비자들은 필요한 물품들을 제대로 공급받기 어려웠다. 따라서 소련에서는 자연히 불법적인 암시장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의 이러한 사적 경제활동은 '제2경제(second economy)'라 불리는데,브레즈네프 시절에는 당국이 제2경제의 존재를 그냥 눈감아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예로 1970년 소련에서 소비된 모든 종류의 알코올 중 4분의 1은 제2경제에서 공급되었다고 한다.

제2경제가 없으면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국도 잘 알았기 때문에 제2경제를 철저히 단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레닌에 의해 시작된 역사의 거대한 실험은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지난 2007년은 러시아 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러시아 현지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분위기를 읽기 어려웠다.

1967년에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혁명 50주년 기념행사를 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혁명의 성과와 대가는 역사가 판단할 일인 듯하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