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러시아 역사를 통해 살펴본 사회주의 계획경제(上)
1917년 봄,스위스에 인접한 독일 서남부의 작은 국경 도시 고트마딩겐(Gottmadingen)에서 세계 역사를 바꾼 열차 한 대가 독일 북부를 향해 출발했다.

객차가 봉인돼 있었기 때문에 훗날 '밀봉열차(The Sealed Train)'라 불리게 된 이 열차에는 레닌(Vladimir Lenin)을 포함한 러시아 혁명가 32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레닌이 밀봉열차를 타게 된 데는 깊은 사연이 있다.

당시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은 모국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르려 했지만,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여서 마땅한 경로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레닌은 러시아의 적국 독일과 협상을 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독일 정부는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가면 러시아가 혼란에 빠져 자신들이 유리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한편으로는 레닌 일행이 독일을 경유하는 도중 독일인들과 접촉해 사회주의를 전파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독일 정부는 고심 끝에 특수 제작한 봉인열차를 레닌 일행에 제공했다. 봉인열차를 타고 독일을 지나 스웨덴으로 건너간 레닌 일행은 무사히 러시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영국의 처칠(Winston Churchill)은 독일 정부의 밀봉열차 제공에 대해 전염병을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옮긴 행위와 같다고 강력 비난하기도 했지만,레닌은 수많은 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화려하게 귀국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all power to the Soviets)'란 구호로 귀국 연설을 마친 레닌은 그해 10월 무장봉기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The Winter Palace)을 점령했다.

마르크스(Karl Marx)의 공산당 선언(1848년)이 있은 지 약 70년 만에 지구상에 공산주의 혁명정권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 전시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

레닌의 볼셰비키(러시아어로 다수파란 뜻을 가지고 있음) 정권은 어렵게 혁명을 완성시켰지만 곧 옛 귀족과 관료들이 이끄는 '백군(White Armies)'의 저항에 부딪힌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지 않은 시점이라 독일군의 침공이 계속되고 있었고,볼셰비키를 증오하는 영국 프랑스 미국이 백군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거나 직접 전투에 참여하면서 지구상 첫 공산주의 정권은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볼셰비키는 '적군(Red Armies)'을 조직하여 백군에 맞섰는데,1917년 말부터 1921년 초까지 적군과 백군이 내전을 벌인 기간을 '전시공산주의(War Communism)' 시기라 부른다.

이 적백의 전쟁 기간에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필요한 물자를 국민으로부터 임의로 빼앗아 분배하는 이른바 징발경제가 운영됐다.

전시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해 강제징발에 순순히 응하는 국민도 있었지만,많은 국민은 이에 격렬히 저항했다.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하거나 가축을 도살했으며,징발 임무를 맡은 파견군을 살상하기까지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주산업은 농업이었기 때문에 경제는 자연히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플레이션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됐고, 농민들의 소극적 생산으로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강제징발과 더불어 기업들의 국유화도 대규모로 이뤄졌다.

그 결과 많은 엔지니어가 공장을 떠나 해외로 도주했고,한동안 기업 경영에 차질이 빚어졌다.

유럽과의 대외거래 중단으로 인한 원자재 부족까지 겹치면서 농업에 이어 산업부문까지 큰 혼란에 빠져들게 됐다.

러시아의 산업 생산량은 전쟁 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고,특히 근대적 부문의 생산량은 5분의 1 수준으로 격감했다.

내전은 결국 볼셰비키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국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농민과 근로자 계급의 지지까지 잃은 사회주의 정권은 그 존재가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의 존속을 위해 경제부터 살려야겠다고 생각한 레닌은 시장경제를 일부 수용한 '신경제정책(NEP · New Economic Policy · 1921~1928)'을 시행했다.

신경제정책은 징발하는 식량의 양을 줄여 농민들로 하여금 잉여생산물을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수공업자와 영세기업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시장거래를 허용했고,일부 대기업은 민간에 임대해주기도 했다.

내전 종료 후인 1922년 러시아가 주변국들을 병합해 성립시킨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 ·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은 이러한 신경제정책을 통해 농업 및 산업생산을 상당 부분 회복시킬 수 있었다.

농촌에는 쿨락(Kulaks)이라고 불리는 부농이 등장했고,네프맨(Nepmen)이란 신흥기업가 계급도 생겨났다.

신경제정책은 결과적으로 소련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는 기여했지만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내 혁명이념과는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신경제정책을 둘러싼 강경파와 온건파의 논쟁 중에 레닌은 사망(1924년)했고,강철의 인간 스탈린(Joseph Stalin)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 일국사회주의 건설과 중앙계획의 시작

레닌의 사망 후 트로츠키(Leon Trotsky)를 비롯한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거한 스탈린은 1930년대 초 독재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새로운 사회주의 노선으로 '일국사회주의(Socialism in One Country)'를 제시했다.

종전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었지만 스탈린은 소련 독자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체제의 승리를 대외에 과시하고 싶었던 그는 소련을 단기간에 강대한 공업국으로 변모시키려 했다.

우선 산업화 추진을 위해 국가경제계획을 수립하는 중앙계획기구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연방국가계획위원회 고스플랜(Gosplan)을 필두로 하는 계획기구들은 5년씩 계획을 세워 산업화를 추진하는 5개년계획(FYP · Five Year Plan)을 입안했고,1928~1933년 제1차 5개년 계획이 추진됐다.

1920년대 말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기술 인력들이 소련으로 대량 유입됐으나,제1차 5개년계획의 목표는 비현실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책정됐기 때문에 목표 달성에 어려움이 많았다.

스탈린은 비밀경찰을 활용해 불만세력을 제압했으며,공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농업집단화 정책을 추진했다. 농업집단화 정책은 콜호즈(Kolkhoz)라는 집단농장에 농민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을 말한다.

집단농장에서 트랙터 등을 활용해 농사를 지으면 적은 인력으로 많은 수확량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곡물 판매를 통해 공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신경제정책에 의해 탄생했던 쿨락들은 반역자로 몰아졌고,이 과정에서 약 500만명의 부농이 살해당해거나 국외로 추방됐다. 무리한 산업화의 추진이 많은 희생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강력한 중앙계획으로 인해 소련은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공업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1933년 소련 지도부는 제1차 5개년계획의 목표가 달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료를 선언했고,곧바로 제2차 5개년 계획(1933~1937)을 승인했다. 그리고 1938년부터는 제3차 5개년계획(1938~1941 · 모든 5개년계획이 5년의 기간을 채워 진행됐던 것은 아니다)에 돌입하였다.

이 시기 소련의 성장률은 서방세계 국가들의 성장률을 크게 웃돌았고,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공업생산량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했다. 겉으로 드러난 수치상으로는 눈부신 성장을 한 듯 보였지만,서방의 경제학자들은 소련이 효율성면에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소련의 성장은 강제력과 막대한 노동 투입 덕분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소련이 강대국으로 부상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독일 히틀러에 맞선 대조국수호전쟁(1939~1945 · 소련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지칭하는 말)을 승리로 이끈 소련은 전후에 자본주의 세계를 대표하는 미국과 체제 경쟁을 벌이게 된다. 동서 냉전(The Cold War)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